2022. 10. 11. 00:39ㆍ수학,과학,공학
내 아이가 볼 만한
2010-03-06 10:42:19
물리학에서는 각종 보존 법칙이 무척 중요하고, 또 유용하다. 외력이 작용하지 않는 고립된 물리계에서는 운동량∙각운동량∙에너지 등의 물리량이 보존된다. 하지만 이런 양들이 보존된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연의 현상들이 무척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열의 흐름이다. 컵에 얼음을 담고 따뜻한 물을 부어 한참을 내버려 두면, 컵 안에는 미지근한 물만 남는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을 아무리 내버려 두어도 따끈한 물과 얼음으로 갈라지지는 않는다. 어느 경우이든 운동량이나 에너지 보존이 깨어지지는 않지만, 왜 얼음이 녹아 미지근해지는 현상만 일어나는 것일까? 보존 법칙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엔트로피 : 물리계의 무질서한 정도 열과 관련된 물리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필수적인 개념이 바로 ‘엔트로피(entropy)’다. 엔트로피를 정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쉬운 방법은 어떤 계의 미시적 상태에 대한 통계역학적 접근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흔히 물리계의 무질서한 정도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매우 엄밀하게 개념을 정의해야 하는 과학에서 ‘무질서한 정도’라는 표현이 다소 애매하게 들릴 수 있다. 여기서 무질서한 정도는 일상적으로 쓰는 정성적인 표현과 같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
예를 들어, 새 학기를 맞아 깨끗하게 정리해 둔 책상은 십중팔구 일주일 정도 지나면 금세 어지럽혀질 것이다. 연필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연필이며 온갖 펜들이 책상 여기저기 나뒹굴고, 줄 맞춰 늘어서 있던 책들도 두어 권쯤 자기 몸을 활짝 펼친 채 책상 위에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기 일쑤다. 여기에 지우개, 책갈피, 메모지까지 가세하면 우리 책상은 난잡하기 이를 데 없이 ‘무질서해진다.’ 이처럼 어떤 물리계가 이전보다 더 무질서해지면 우리는 그 계의 엔트로피가 증가했다고 말한다.
계의 무질서한 정도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취할 수 있는 상태의 수를 비교하면 된다
그렇다면 어떤 계가 무질서한지 아니면 잘 정리되어 있는지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좋은 방법은 그 계가 취할 수 있는 상태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를 비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책상 넓이의 1/10 크기를 가진 연필꽂이 안에 연필 10자루가 들어가 있을 확률은 연필의 길이나 크기를 무시한다면, 아래와 같다.
자그마치 백억 분의 1이 된다. 만약 10자루 중 2자루의 연필이 연필꽂이에서 나와 책상 어딘가에 나뒹굴어 다닐 확률이 앞의 경우보다 3,645배 높다.
여기서 10C2는 열 가지에서 두 가지를 고르는 경우의 수를 의미하는 조합 기호이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열 자루가 다 꽂혀 있는 경우를 잘 정돈된 상태로 볼 수 있고 두어 자루가 밖에 나와 있으면 무질서한 상태로 볼 수 있다. 만약 연필 열 자루를 임의로 책상 위에 놓을 때, 열 자루가 다 연필꽂이에 들어갈 확률보다 그렇지 않을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이처럼 두 가지 경우 중에서, 연필이 배치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큰 쪽을 우리는 ‘더 무질서하다’고 말한다.
경험적으로 보더라도 우리의 책상은 시간이 갈수록 정돈되기보다는 무질서해지는 경향이 무척 강하다. 즉, 시간이 갈수록 우리 책상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이렇게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경향은 우리 책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연의 근본적인 법칙의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열역학 제2법칙이다.
열역학 제2법칙 : 고립된 계의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
얼음이 더운물과 만나 녹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얼음은 H2O 분자들이 서로 매우 조밀하게 붙어 있는 상태라 H2O 분자들이 자리 잡고 있을 경우의 수가 물이 비해 상대적으로 작다. 반면 얼음이 녹아 그 분자들이 컵 속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다면, 그때 H2O 분자가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훨씬 많아진다. 즉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반대로 미지근한 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부는 얼음이 되고 일부는 뜨거운 물이 되는 과정은 마치 연필을 책상 위에 던졌을 때 상당수가 연필꽂이에 들어가는 경우와도 비슷하다. 즉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반응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잉크 방울이 물 속으로 퍼지는 현상이 있다. 잉크 방울이 물에 들어가면 주변 물 분자들과의 끊임없는 충돌을 통해 서로 뒤섞이게 되는데, 아주 좁은 영역에 잉크 분자가 몰려 있을 확률보다 물 전체에 고루 퍼져 있을 확률이 월등하게 높다. 그래서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 물 전체가 흐릿해진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잉크 분자들이 다시 한데 모여 잉크 방울을 만들지는 못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비빔밥을 비비는 행위와도 똑같다. 한번 비벼지면, 다시는 원상태로 복원하지 못하는 것처럼.
엔트로피를 줄이기 위해서는 일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고립된 계에 한해서 성립하는 법칙이다. 그러니까 고립되지 않은 계에서는 엔트로피가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어떤 계의 엔트로피를 줄이려면, 외부에서 그 계에 물리적인 ‘일(work)’을 해 줘야만 한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일이란 쉽게 말해서 힘을 통해 에너지를 전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어지러워진 책상을 정리하려면 우리는 힘을 들여 일해야만 한다. 미지근한 물을 얼음으로 만드는 냉장고는 모터를 돌려 냉매를 순환시키고, 이 냉매가 온도를 낮춰 얼음을 만든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커다란 고립계로 생각한다면 전체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책상을 힘들여 정리하면 몸에서 열이 나며, 냉장고의 모터가 돌면 역시 열이 난다. 이 과정에서 더 많은 양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어떤 계의 구성상태가 좀 더 높은 확률의 구성상태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외부에서 어떤 계에 열을 공급해 주면 이 계는 그 열의 일부를 이용해서 자신의 구성상태를 보다 높은 확률의 구성상태로 바꾼다. 그리고 남은 열로 물리적인 일(work)을 한다. 그러니까 엔트로피는 열량 가운데 물리적인 일을 할 수 없는 양을 나타내는 물리량이다.
엔트로피는 또한 숨겨진 정보의 양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책상 위의 연필을 다시 생각해 보자. 엔트로피가 아주 낮은 경우, 예컨대 열 자루의 연필이 모두 좁은 연필꽂이에 다 꽂혀 있는 경우에는 우리가 열 자루의 연필의 위치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열 자루가 모두 연필꽂이를 벗어나 책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면, 앞의 경우에서처럼 연필의 위치를 콕 집어서 말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자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면서 연필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숨겨진 것이다. 물 속에 떨어뜨린 잉크의 예를 들자면 잉크 방울의 정보가 물 속 전체로 퍼져 나가 버린 것과 같다.
블랙홀의 엔트로피도 계속 증가해야 하며, 이 때문에 블랙홀이 증발해버린다는 주장도 있다
열역학에서나 등장하던 엔트로피는 중력에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블랙홀 때문이다. 블랙홀은 중력이 극단적으로 강력한 시공간의 영역으로서, 빛조차도 어느 영역(지평선) 안에서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1972년 대학원생이던 제이콥 베켄슈타인은 블랙홀이 엔트로피를 가지며, 열역학 제2법칙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블랙홀의 엔트로피가 그 지평선의 넓이에 비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생각은 너무나 혁명적이어서 스티븐 호킹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호킹은 2년 뒤 수학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베켄슈타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더 나아가 호킹은 블랙홀이 결국에는 증발해 버릴 것이라는 대담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블랙홀로 빠져든 정보가 손실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보의 손실은 양자역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현상이라, 이 ‘정보의 역설’을 두고 수십 년 동안 많은 학자가 논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중력에 대한 양자역학적인 이해가 또한 깊어지게 되었다.
글 이종필 / 연세대 물리 및 응용물리 사업단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입자물리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등과학원 물리학부의 연구원이다. 저서로는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가 있고, 역서로는 [최종이론의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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