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4. 20:52ㆍFinance, Biz
2016-12-27 07:58:03
금융 자유화가 재촉한 미국 자동차산업의 몰락
페이지 정보
글 : 채영석(charleychae@global-aut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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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0 16:2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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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의 긴 역사를 가진 로마의 멸망에 대해서는 지금도 해석이 분분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오랫동안 현장을 답사하며 취재한 결과를 15년간에 걸쳐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로 내놓았다. 로마의 역사에 대해 그만큼 새로운 시각도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사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와의 대화를 통한 이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기도 했다. 한 쪽으로 치우친 역사를 강요하는 것은 결코 통용될 수 없으며 그 결과는 수없이 반복되는 쇠퇴와 멸망이다.
세상을 집어 삼킬 듯했으며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GM이 2009년에 파산보호신청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없었다. 아니 21세기에 들어서도 그 거대한 시장 때문에 미국자동차산업의 몰락을 점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GM은 2009년 파산보호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밥 러츠는 GM이 내리막길을 걷게 된 이유에 대해 기업문화와 정부, 언론 등을 거론했다. 여기에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 재규어 등 캐딜락보다 더 고급스러운 고급차들로 부유층을 공략하기 시작한 것도 이유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디자인팀의 오만함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할리 얼에 이어 대권(?)을 물려 받은 빌 미첼은 알프레드 슬론의 총애를 받고 있어 디자인 업무에 방해가 되는 경영진의 결정을 바꿔 달라고 수시로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승용차와 트럭 디자인은 물론 사무실을 꾸미는 일이나 건물 설계, 회사 소유 비행기 인테리어까지 GM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디자인 부서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또 다른 일화로는 빌 미첼이 GM의 3대 스포츠카인 카마로와 파이어버드, 콜벳의 엔진소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페라리를 사들여 그 12기통 엔진을 파이어버드에 이식해 개조하기도 했다. 양산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그의 위상이 하늘을 찌른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때까지는 디자인팀에 힘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어브 리비츠키 (Irv Rybichki)라는 관리형 디자이너가 그동안의 화려함과는 다른 밋밋한 모델들을 만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디자인이 주인공인 시절을 끝낸 것이다. 더 이상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아니었으며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는 유럽 메이커들처럼 디자이너들의 개성personality를 강조하는 일은 없어졌다.
이때부터 만들어진 차들은 모두 ‘설문조사’나 ‘시장 분석’에 따라 ‘고객의 니즈에 맞춰’ 나왔다. 당연히 개성은 없고 브랜드별 차별화도 사라져갔다. 투자비용은 줄었지만 제품으로 고객을 사로잡던 시대의 디자인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창의성이 사라지면서 소비자들은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미국 자동차회사들의 오만은 시장 때문이었다. 그들만의 놀이터였던 것이다. 1952년 미국에서 팔린 수입차는 2만 7,000대, 1955년 그 두 배인 5만 4,000대로 늘었지만 시장점유율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미국차회사들은 무시했다. 그런데 1957년에는 22만 5,000대로 급증하며 비로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동차의 안전성과 배기가스 문제가 부상했다. 그동안은 자동차회사의 성공을 정치인들이 이용해 국위선양의 도구로 사용했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자 소비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자동차회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였다. 미국의 정치인들이 진정으로 소비자들을 대변했는지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상황은 그렇게 변했다. 여전히 공급자 중심의 시장이었다는 것이다.
안전에 대한 관심은 유럽에서 먼저 시작됐다. 볼보가 1959년 세계 최초로 3점식 안전벨트를 채용했다. 1967년에는 영국 정부가 안전벨트를 의무화했다. 그에 반해 레이건 행정부는 1980년대가 되어도 안전벨트 의무화를 미뤘다. 역시 정치적인 의도다. 소비자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거대 자본의 입장을 대변해서 그랬다.
그러나 공급자 중심의 구조가 소비자 우선 순위로 거세게 바뀌자 마냥 모른 채 할 수만은 없었다. 1965년 미국 의회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줄이기 위한 자동차 공기 오염법을 통과시켰다. 그래도 미국 자동차회사들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겨우 10여년 전에 미국시장에 발을 들여 놓은 일본차들이 관심을 보였다.
안전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게 한 사건은 링컨 컨티넨탈 Ⅲ을 탄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11월 22일 낮 12시 30분 저격 당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자동차의 안전성에 대한 불신은 커졌고 1965년 랄프 레이더가 ‘어느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 Unsafe at Any Speed’를 출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그는 디트로이트가 얻는 엄청난 이익 때문에 자동차가 비판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개탄했다. 그는 자동차가 대중이 의미있는 논의를 하지 않는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남았다고 주장하면서 자동차 언론이 제조사들에게 비겁하게 굴복한다고 비난했다.
이 틈을 타서 수입차들이 점차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1960년 미국의 자동차 수출은 11만 7,126대였는데 수입차는 44만 4,474대에 달했다. 이때까지는 수입차의 4분의 3이 독일차였지만 일본이 경제 성장을 하면서 일본차의 공습이 시작됐다.
일본차의 공습이 본격화된 것은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파동 이후였다. 1973년 OPEC에 의한 석유무기화 시도로 유가가 70%나 급등했다. 에너지의 46%를 석유로 만드는 미국에 비해 77%를 석유에 의존하는 일본은 특히 유가 급등에 취약했다. 그것이 미국에는 독이 됐고 일본차에게는 기회로 작용했다.
일본 정부는 에너지 다양화를 위해 산업, 가정, 자동차를 위한 대체 연료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배기가스를 줄이기 위해 자동차 엔진에 촉매 컨버터를 도입한 최초의 국가였다. 이로 인해 1972년 이후 10년 동안 일본의 대기오염은 3분의 1로 줄었다.
서구의 휘발유 가격은 즉시 40%가 상승했고 거의 매일 유가가 올랐다. 미국에서는 전국적으로 시속 55마일로 속도를 제한한다거나 신차에 더 강력한 환경기준을 부과하는 등 비상 조치가 1975년 에너지 정책 보존 법안에서 공식화되었다. 1979년 2차 오일 쇼크가 촉발되고 1980년 9월 세계 최대 산유국 이란과 이라크가 전면전을 시작하면서 유가는 더 빠르게 올랐다.
이를 계기로 덩치 크고 배기량 높은 차에 대한 시선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크라이슬러였다. 크라이슬러는 미국공장 6개 중 5개를 닫았다. 크라이슬러는 이후 리아이아코카가 첫 번째 미니밴을 내놓는 등 안간힘을 썼으나 1998년 다임러 벤츠에게 매각되고 말았다.
석유파동으로 인해 1975년 출범한 CAFÉ(Corporate Average Fuel Economy)기준이 1978년형 모델부터 리터당 평균 7.7km로 높이고 1985년까지는 평균 11.7km로 높여야 했다. 대형차 위주의 미국 메이커들은 이 기준을 충족할 수 없었다.
디트로이트 빅3는 강제적인 다운사이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만큼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GM과 크라이슬러는 뒷바퀴 굴림방식을 모두 없앴고 포드는 하나만 남겼다. 8기통 엔진은 6기통과 4기통으로 바꾸었고 그에 맞는 변속기도 새로 개발했다. 그를 위해 수조원이 넘는 비용을 쏟아 부어야만 했다. 이로 인해 GM도 자금이 고갈되어 버렸다. 당연히 부품업체들도 상상을 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소형화로 인한 문제점이 빈발했고 품질과 안전성, 내구성 문제가 속출됐다. GM 의 대표적인 모델 캐딜락 엘도라도와 스빌, 뷰익 리비에라 등의 판매가 급감했다. 포드와 크라이슬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높은 유가에 익숙해 소형화에 성공한 유럽과 일본 자동차회사들에게는 기회였다. 이때부터 미국의 소비자들은 연비성능이 좋은 일본차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등 소비자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다양한 마케팅 기법을 동원하며 시장을 잠식해갔다.
건강보험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UAW(United Auto Workers)는 건강 보험 지원 비용을 3년마다 재 계약할 수 있게 했다. 국가가 건강보험을 운용하는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미국은 제조업체가 부담해야 한다. 미국은 어떤 형태로든 건강보험이 없으면 지금도 생활이 불가능한 구조다. 그것을 바꿔보기 위한 것이 ‘오바마 캐어’인데 트럼프가 다시 그것을 무력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재기되고 있다. 선출된 권력이 모든 정책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정작 세금을 내는 국민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한계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이다. 경제학자들은 신 자유주의라고 표현한다.
1990년에 밥 스템펠 Bob Stempel이 CEO로 취임하면서 건강보험 확대 외에도 퇴직자에게도 건강보험 비용을 대 주기로 했다. 당연히 자동차회사들의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자동차 판매 감소로 생산은 줄고 그만큼 퇴직자는 늘었다. 그리고 건강보험 비용은 1990년대 초중반 내내 매년 10%에 13%씩 증가했다. 2009년 파산 보호 신청 후 새로 시작된 New GM의 지분 구조에도 전미 자동차 노조(UAW) 퇴직자 건강보험기금 17.5%가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적 부진으로 노동자들의 일시 해고가 가능하게 하는 데는 합의에 도달했다. 일시 해고 기간 동안에도 2년 동안 기존 급여의 95%를 받을 수 있었다. 2년 내에 다시 출근한다는 조건이 있었으나 판매 부진으로 그런 일은 드물었고 실업자수는 더 늘었다. 이 역시 건강 보험 비용과 함께 디트로이트 빅3가 20세기 말 아무리 노력해도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 중 하나였다.
외부적인 문제도 겹쳤다.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자동차회사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뚜렷한 증거 없이 지구온난화는 종교화되기 시작했고 자동차회사들은 정부가 제시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 기준을 맞추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부어야만 했다.
또 하나는 언론에 관한 내용이다. 밥 러츠는 편파적인 언론보도도 미국 자동차회사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시장 경제 자본주의자’인 그의 시각에서 언론은 좌파다. 그는 특종 경쟁에 내몰린 기자들이 기사의 품질이나 정확도보다는 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것을 찾는데 혈안이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위의 지구 온난화에 관한 내용만해도 정확한 정보없이 엄청나게 부풀려 보도한다고 말한다.
특히 디트로이트 빅3의 수익원인 SUV가 지구온난화의 원흉으로 꼽히고 있는 것에 개탄한다. 유럽 대 배기량 스포츠카와 비교하면서 말이다. 그는 원래 자발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리콜에 대해 일부 언론이 ‘토요타는 자발적으로 리콜에 임했다.’는 우호적인 표현을 사용해 미국 자동차회사들의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장 극적으로 미국의 자동차산업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것은 1980년 레이건이 주창한 금융자유화다. 그리고 빌 클린턴 정부에서 이루어진 금융규제철폐로 인한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미국은 경제 재건, 교역 증대, 그리고 내수 증가에 따라 큰 번영을 누렸다. 수백만 명의 고졸 노동자가 안정적이고 월급을 많이 주는 곳에서 일했다. 이들 대부분이 일하는 제조업 분야는 성장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적절한 급여와 보너스를 주는 곳에 취업했다. 이들은 첫 직장에서 퇴직할 때까지 일했다. 그 결과 1991년까지 미국 경제는 예측 가능한 순환 주기를 보여 주었다.
이후에는 고용없는 경기회복이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금융자유화와 금융규제철폐로 인한 것이라고 레이건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입안했던 폴 크레이그 로버츠는 말한다. 그는 미국 내에서 높은 임금과 비용부담으로 어려워진 제조업체들이 생산시설을 중국을 비롯한 저비용국가로 옮겨서 이룬 성과는 자본과 금융업자들의 배만 불린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미국 내에서는 일자리가 사라졌고 중산층이 몰락했다는 것이다.
그는 금융사기와 일자리의 역외이전으로 뽑아 낸 돈은 리치스탄(Richstan)에서 다시 등장한다고 말한다. “리치스탄은 부를 가리키는 리치와 땅을 가리키는 스탄을 합한 신조어로 미국 내에 있는 일종의 신생 국가다. 리치스탄에서 5,000만 달러 짜리 200피트 요트를 사려면 2년간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놓아야 한다. 값 비싼 롤렉스 시계는 리치스탄에서는 월마트 쓰레기로 여겨진다. 리치스탄의 시민은 73만 6,000달러짜리 손목시계를 차고 보석이 촘촘히 박힌 70만 달러 몽블랑 펜으로 서명을 한다.
리치스탄 사람들은 1억 달러 이상 재산가들만의 모임에 가입하고 골프클럽 회원이 되기 위해 65만 달러를 지불한다. 그들이 먹는 햄버거는 50달러이며 오믈렛은 1,000달러이다. 한 병에 90달러 미네랄 워터를 마시고 1만 달러짜리 ‘마티니 온 어 락’을 즐기기 위해 뉴욕의 알곤퀸 호텔에 들어간다.
리치스탄에 사는 시민은 어떤 사람들인가? 회사를 해외로 옮기고 미국인 직원들이 받던 급여를 자신의 1억 달러짜리 보수로 바꿔 치기한 기업의 CEO 들이다. 또한 비우량 담보대출 파생 상품을 시장에 팔아 세계 금융위기를 불러 일으킨 투자은행가와 해지펀드 매니저들이다. 이들 중 한 명은 2006년 17억 달러를 급여로 챙겨갔다.
2009년 GM이 파산 보호 신청에 들어가 자리에서 물러났던 GM의 릭 왜고너 회장이 퇴직금으로 1,700만 달러를 받았다는 뉴스에 놀란 것을 생각하면 미국의 금융 사기는 짐작할만하다.
토마 피케티는 이런 금융업자들을 제재하기 위해 ‘21세기 자본’을 통해 ‘글로벌 자본세’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홍콩 중문대 랑센핑 교수는 이에 대해 미국은 낮은 금리로 빌린 돈으로 저가의 중국산 제품을 구매해 생활하는 것이 미국인들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2001년 911 테러 이후 등장한 무이자 할부의 등장 등으로 수치상으로 판매는 증가했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의 소비자들의 소득 증대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주장한다. 금융업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생상품 등을 개발해 시장을 교란했다.
결국 금융에 의해 지탱하던 미국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로 사상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런 금융 사기는 멈출 줄 모른다. 미국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의 도화선이었던 CDO와 비슷한 상품이 또 등장해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
1980년 레이건과 함께 영국의 마가렛 대처도 금융자유화의 기치를 내걸었고 결국은 영국 자동차산업이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은 1,500만영의 제조업 종사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영국은 제조업 종사자가 800만명에서 300만명으로 줄었다. 금융 수익은 늘었을 지 몰라도 실업은 증가했고 삶은 피폐해 갔다.
그것은 이들과 결탁한 정치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는 총기사고가 잦다. 많은 사람들이 총기규제를 이야기하지만 정치인들이 무기업자들의 돈을 받아 선거를 치르고 정치활동을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결국은 거대 자본과 그 자본가들의 배 불리기에 앞장 서며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리는 금융업계의 횡포에 맞선 것이 1% 대 99%를 주장하며 월 스트리트에서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그것도 일회성으로 지나가고 말았고 그들의 횡포는 지금도 미국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수치상으로 미국 자동차산업은 일본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1980년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 생산대국에 오른 것이다.
* 참고로 이 난에 나오는 내용들은 기자가 30년 동안 작성한 내용은 물론이고 여러 서적들에서 발췌한 것도 있다. 그 발췌를 직접 언급하지 못한 것은 후에 별도의 서적으로 발간을 목적으로 한만큼 리스트를 정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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