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14. 20:54ㆍFinance, Biz
2016-12-30 15:26:09
산업화 넘어 세계화 길 연 일본차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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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채영석(charleychae@global-aut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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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3 11:22:31 |
본문
일본차가 미국에 처음 수출된 것은 1957년 토요타 크라운부터다. 토요다 사기치가 설립해 창업한 '토요타 자동 방직기 제작소'에, 1933년 9월에 설립한 자동차 부서가 출범한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토요타는 자동차회사를 표기하는 고유명사이며 토요다는 사람 이름이다.)
토요타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5년이 지난 1950년에 경영 위기에 빠지면서 노사 관계는 갈등으로 이어졌다. 노동자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인 생산 인원 감축, 곧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부실경영을 한 토요다 기치로 사장의 해임을 요구하는 토요타 자동차 노동조합의 총파업이 발생했다. 그 위기를 탈출할 수 있게 한 것은 1950년에 발발한 한국 전쟁이었다. 토요타는 이 전쟁에 5,000대의 미군용 트럭 대량 주문으로 인해 기사회생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1957년 토요타 크라운이 일본차 중 처음으로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회사의 상황이 말해 주듯이 품질 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미국시장 진출 초기에 시장의 반응은 형편없었다. ‘고장 잘 나는 차, 한 번 고장 나면 계속 고장 나는 차, 고속도로에서 맥을 못 추는 차’ 등의 이미지로 싸구려 차로 여겨졌다.
1958년 맬컴 브리클린이라는 차명으로 팔린 스바루 360은 ‘저렴하고 못 생긴 차가 좋다.’는 슬로건을 내 세웠으나 ‘미국에서 가장 안전하지 못한 차’라는 혹평을 받아야 했다. 당시 일본의 자동차산업은 규모 면에서도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1956년 전체 생산대수가 3만 2,000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의외로 여러 개의 자동차회사들이 달려 들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1965년에는 토요타가 1968년에는 닷선과 혼다가 영국에 수출을 시작했다. 이 해에는 토요타 코롤라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현지 생산을 시작했다.
먼저 주목을 끈 차는 닛산의 닷선(Datsun)이었다. 닷선은 겐지로 덴, 로쿠라 아오야마, 메이타로 타케우치 세 사람의 이름을 딴 DAT 브랜드는 당초 이스즈트럭 등과 함께 히타치금속 산하에 있었다. 1914년 영국 오스틴 세븐의 짝퉁을 만들어 닷선(Datson), 즉 닷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그러나 Son의 발음이 일본어로 손실을 의미한다고 해서 후에 Datsun으로 바꿨다.
DAT 브랜드는 닛산의 전신 닛폰 산요가 1931년 인수했고 1933년에 닛산자동차가 본격 출범하게 된다. 그러나2차 대전의 보복으로 미국에 의해 닛산은 강제로 해체되었고 이후 석유 부문으로 되살아났다가 1967년 다시 닷선 510살롱을 생산하면서 재기를 시작한다.
이 시기 일본 자동차산업은 급성장했다. 1968년 일본은 연간 400만대 생산, 60만대 수출이라는 기록을 올렸다. 미국으로의 수출은 1967년 8만 2,035대, 1968년 18만 2,547대로 한 해에 두 배의 성장을 했다. 닷선 510은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의 디자인으로 바뀌어 닛산 블루버드라는 이름으로 팔렸다.
일본차의 부상은 수치로 가시화됐다. 1970년 미국 수입차 1위 폭스바겐에 이어 2위에 토요타, 3위에 닷선이 올랐다.
저가 일본차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1972년 등장한 혼다 시빅이다. 수냉식 CVCC(Compound Vortex Controlled Combustion)엔진을 탑재한 시빅의 판매가 급격히 늘어났다. CVCC란 복합와류연소엔진으로 이 엔진이 당시로서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1975년부터 강화된 미국의 배출가스규제기준인 소위 ‘머스키법’을 클리어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로 인한 효과는 워낙에 커서 미국의 소비자들에게 혼다의 이미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참고로 머스키법이란 1970년 미국에서 제정된 것으로 1975년까지 유해가스 배출량을 1971년의 1/10로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는 ‘내연기관 금지법’이라고 할 만큼 어려운 과제였으나 혼다가 1973년 2월 2일 CVCC엔진으로 세계 최초로 머스키법을 통과했고 이로 인해 미국의 소비자들에게 혼다의 이미지는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특히 혼다는 촉매를 중심으로 하는 후처리 방식이 아닌 엔진 자체 개량을 택해 저공해를 달성했다는 점에서 그 기술력을 높이 평가 받았다. 시기적으로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다시 말해 1973년에 발생한 석유파동으로 인해 시빅의 높은 경제성은 소비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이다. 엔진에 관한 혼다의 철학을 잘 보여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릇 세상 일이라는 것이 그저 좋은 기술이라고 해서 모두 그 빛을 보는 것은 아니다. ‘타이밍’ 또한 중요한 요소다. 물론 그런 적절한 시기를 활용할 수 있는 내공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이후 모든 자동차 메이커들은 혼다의 기술력을 추종해 엔진 기술을 경쟁적으로 개발해 나갔고 그로 인해 가솔린 엔진은 한층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CVCC가 처음 개발됐을 때만 미국의 빅 3는 연비성능이 좋고 매연을 덜 내 뿜는 기술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오일 쇼크는 빅3가 양산해내던 저 연비, 고 매연의 미국 차량들에 대한 미국 소비자들의 외면을 가져왔고 CVCC를 비롯한 효율적인 엔진개발 노력은 혼다를 비롯한 일본계 회사들이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득세하는 시초가 되었다.
이 CVCC 엔진은 1976년 혼다의 대표적인 중형 세단 어코드에 탑재되어 이번에는 승용차 라인업의 신분상승에 기여하게 된다. 1979년에는 2세대 시빅이 등장하면서는 기존의 CVCC엔진을 더욱 강화시킨 CVCC-2 엔진을 탑재했다.
기름 덜 먹고 경제적인 모델에 집중한 일본 메이커들은 1973년 발발한 석유파동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당시 일본차들은 독창성이거나 매력적이라는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작은 차체, 내구성, 연료 효율성, 작은 매연 등을 장기로 내 세우며 시장에 어필했다.
1973년 OPEC는 이스라엘, 시리아, 이집트 사이에 전쟁이 끝난 원유 유출금지를 강요했다. 원유가는 세 배로 뛰었고 미국은 경기 후퇴 상황에 빠졌다. 가솔린의 부족은 작고 연료 효율이 좋은 자동차들이 각광을 받게 했다. 1929년 대공황 이래 미국 최악의 경기 후퇴를 초래했던 두 번째 원유 유출 금지로 이란 혁명이 촉발되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은 자동차산업의 중심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이동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석유의 매장량과는 관계없이 석유업자들의 공급량 농간이 시작된 사건이었지만 이 후 자동차산업은 그 모양세가 달라졌다. 정작 석유 매장량이 많은 미국은 ‘석유 고갈론’ 등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일본의 자동차회사들은 기름 덜 먹는 자동차의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보고 소형 저가차로 시장을 공략했다.
1975년에는 토요타와 닛산이 미국 수입차 1, 2위를 점령했다. 1978년 2차 석유 파동은 일본차의 부상을 더욱 부채질 했다. GM은 1980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7억 6천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오일 쇼크에 대한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 때부터 비로소 미국 메이커들은 일본 메이커들을 경쟁 상대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두된 것이 통상마찰이었다. 무역 역조를 내 세워 어떤 제제를 가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유럽 메이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일본 메이커들이 미국과 유럽에 제안한 것이 수출자율규제였다. 미국과 유럽으로 연간 수출 대수를 스스로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한도 ‘미국과 유럽 메이커들이 경쟁력을 갖출 때까지’였다.
그런 제안과 동시에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그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냈다. 수출 자율규제는 대수 제한이라는 점을 활용했다. 소형차보다는 수익성이 높은 중 대형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또 하나가 현지 생산이었다. 일본에서 만드는(Made in Japan) 것이 아니라 판매되는 곳에서 생산한다고 하는(Made by Japan)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혼다는 1979년 미국 오하이오 주 매리스빌에 현지공장을 건설했고 1981년 준공했다. 처음에는 모터사이클을 생산했으나 1983년 한 해에 3만대의 어코드가 생산됐다. 이듬해에는 다시 세 배로 증가했다. 이것이 일본차에 의한 세계화(Globalization)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GM의 CEO 로저 스미스는 ‘자동차에서 일본이 창조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조그마한 컵 홀더 밖에 없는 것 같다.’라고 조롱했다. 로저 스미스는 1988년 월 스트리트 저널에 의해 ‘80년대 실패한 경영자’로 낙인 찍혔다.
하지만 미국 디트로이트 메이커들은 일본 업체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라이슬러가 미쓰비시의 제품을 닷지 브랜드로 팔았고 GM은 토요타와 제휴했다. 한국 수입차 초기에 국내에도 들어 온 크라이슬러의 이글 탈론은 미쓰비시 이클립스의 라이선스 모델이었다.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혼다는 1979년 브리티시 레일랜드와 협력하기 시작했고 혼다에 트라이엄프와 로버의 이름을 붙여 판매했다.
일본차의 급부상은 일본 경제의 급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자동차 왕국 미국 정부를 긴장하게 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역시 정치적인 사건 1985년의 플라자합의다. 플라자합의(Plaza Agreement 또는 Plaza Accord)란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G5 경제선진국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들의 모임에서 발표된 환율에 관한 합의를 가리킨다.
당시 미국은 대외 무역수지 불균형과 안으로는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것이 레이건 정부의 유명한 쌍둥이 적자이다. 그리하여 경제 선진국들에 도움을 요청하여 성립한 합의가 플라자 합의이다. 합의에서는 달러화의 가치를 내리고 엔화의 가치를 높이는 정책이 채택되었다. 발표일 다음날에 달러화 환율은 1달러에 235엔에서 약 20엔이 하락하였다.
1년 후에는 달러의 가치가 거의 반이나 떨어져 120엔 대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태까지 되었다. 플라자합의에 의한 변동환율 이행이라고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써도 유효한 것이었다. 결국 이는 일본의 버블 붕괴와 함께 오늘날 일본의 장기침체의 원인이 됐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짜고 일본의 기를 꺾는데 성공했다. 지금은 다시 일본과 합세 해 중국 견제에 나서고 있다.
플라자합의로 미국의 일본 죽이기는 성공했지만 자동차산업은 달랐다. 정치적인 행위로 산업구조를 바꿔보고자 하는 시도는 비일비재하지만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오늘날은 그런 의도가 뜻대로 먹혀 들지 않는다.
이미 다국적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일본차 회사들은 새로운 형태의 성장을 거듭해 갔다. 자동차산업에 대량 생산기법을 도입한 것은 포드였지만 규모의 경제를 가장 잘 이해한 것은 일본 메이커였다. 더 이상 내국 중심이 아니라 현지 생산으로 다양한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를 실현시킨 것이다.
일본차의 해외 생산으로 인해 1993년 나라별 자동차 생산대수에서 다시 미국이(Made in U.S.A.)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섰다.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미국 내에서 생산하는 일본차로 인한 것이었다. 이런 일본 메이커들의 전략의 결과는 오늘날 세계 자동차산업의 지도를 형성하게 했다.
2007년 기준 일본 메이커들의 일본 내 자동차 생산은 1,048만대, 해외 생산은 1,083만대였다. 2013년에는 일본 내 자동차 생산은 980만대, 해외 생산은 1,686만대로 전체 2,666만대가 일본차였다. 2007년 지구촌의 연간 자동차 판매대수는 약 7,000만대, 2013년은 8,600만대였기 때문에 일본제(Made by Japan)의 자동차가 그 1/3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메이커들의 급성장 배경에는 미국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난 데 있었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을 때까지도 세상은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미국 중심 천동설에 도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이미 1980년대 일본에 의해 깨지기 시작했다.
일본 메이커들의 사업 마인드는 달랐다. 혼다는 만드는 즐거움, 파는 즐거움 소유하는 즐거움 등 세 가지 즐거움을 내 세웠다. 혼다의 모든 직원은 평등, 협동, 자주성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과 이 세 가지 즐거움을 적은 카드를 갖고 다녔다.
토요타는 토요타 웨이(Toyota Way)를 내 세웠다. 도전, 개선, 현지현물, 존경, 협동 등 5대 강령을 바탕으로 하는 차 만들기를 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토요타 생산 방식이다. 적기 부품 공급을 비롯한 저스트 인 타임 등으로 표현되는 토요타 생산 방식의 핵심은 그러나 획기적인 인원 저감에 있다.
포드주의는 12시간 반이 걸리던 대당 생산 시간을 1시간 반으로 줄이고 시급을 2.54달러에서 5달러로 인상해 소비와 생산을 동시에 살려 낸 대량 생산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비해 토요타주의는 다른 관점에서의 시각이 필요하다. 1980년 기준 GM은 연간 500만대를 생산하는데 80만명의 인원을 고용했으나 토요타는 400만대를 생산하는데 7만명으로 해결했다.
가장 큰 요인은 자동화 기술의 발전이다. 이때부터 자동화가 일자리를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자동화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일자리가 창조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결코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미국의 실업률이 7.5%로 집계된 것은 착각이라고 폴 크레이그 로버츠는 말한다. 이 수치는 취업을 원하기는 하지만 일자를 구하지 못한 구직 포기자와 정규 직장을 구하지 못해 할 수 없이 파트제로 일하는 불완전 취업자들을 실업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측정된 실업률은 13.9%다.
이 역시 축소한 수치라는 주장이다. 1994년부터 1년 혹은 그 이상의 장기간 실업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경제활동이 가능한 노동인력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실업률을 축소하기 위한 방책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다시 계산해서 나온 실업률은 23%로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실직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런 오도된 실업률이 나오는 것은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과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학자, 언론 등의 합작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공지능에 의해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포장하고 있다.
어쨌거나 엄청난 인건비의 저감이 오늘날 토요타가 있게 한 원천이다. 지금 전 세계 모든 자동차회사들은 토요타 생산방식에 입각해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 비용 저감이 최대의 과제인 시대라는 것을 말해 준다. 토요타 생산방식은 자동차의 가격 인상을 억제할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자동차의 수요를 늘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1980년대 초부터 캠리와 코롤라는 미국시장에서 패밀리카로, 택시로 필수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캠리는 1982년 3월, 토요타의 세계 전략 모델로 데뷔 했다. 모델의 뿌리는 1980년에 셀리카에서 파생한 스포티한 4도어 세단. 토요타 라인업의 코로나와 마크2 사이의 갭을 메우는 중형 패밀리 세단으로 기획된 모델이었다.
캠리는 1983년에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미국시장에서의 반응은 뜨거웠다. 1985년까지 2년 동안 모두 12만 8천대가 판매됐다. 1992년 3세대 모델부터는 미국시장 분류기준으로 중형세단의 범주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5년만인 1997년에 데뷔한 4세대 모델은 2000년까지 4년 연속 포드의 토러스를 제치고 미국시장 베스트 셀러자리에 오르며 미국시장 패밀리 세단의 대명사의 자리에 올랐다. 4세대 모델은 과거 토요타의 한반도 판권을 갖고 있던 진세무역에 의해 미국산 모델이 수입된 적이 있다.
캠리Camry라는 차명은 왕관(冠)을 뜻하는 일본어 “Kanmuri”에서 유래한 것이다. 크라운 (王冠), 코로나(光冠), 카롤라(花冠) 등도 비슷한 명명법이다.
미국이라는 거대 시장은 캠리를 밀리언 셀러카로 등극하게 해 주었다. 전 세계적으로 밀리언 셀러 1호차는 헨리 포드가 대량 생산기법을 동원해 생산한 T형 포드다. 1908년부터 1927년까지 1,574만대가 판매됐다. 두 번째는 폭스바겐 비틀이다. 폭스바겐 비틀은 세계 제 2차 대전 전에 개발되어 전쟁이 끝나고부터 생산되어 1978년 단종될 때까지 무려 2,100만대라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세 번째는 역시 폭스바겐의 골프다. 1974년 데뷔한 골프는 비틀에 이어 두 번째로 2,000만대 생산을 넘었다. 골프의 누계 생산대수는 2015년까지 3,200만대가 팔렸다. 네 번째는 혼다 시빅으로 2,300만대 이어서 토요타 캠리가 1980년 데뷔 이래 1,600만대를 생산했다.
지금까지 단일 모델로 누계 판매대수가 가장 많은 것은 토요타 코롤라다. 1966년 데뷔 이래 2013년 4,000만대를 돌파했고 2016년 9월 4,400만대가 넘어 베스트 오브 베스트 위치에 있다. 토요타 코롤라는 당초 뒷바퀴 굴림방식 모델로 기획됐다. 하지만 폭스바겐 골프를 벤치마킹하면서 앞바퀴 굴림방식으로 전환했다. 회사 창립은 토요타가 1933년으로 1948년의 폭스바겐보다 앞서지만 차만들기에서의 노하우는 토요타가 폭스바겐을 벤치마킹했다.
참고로 브랜드 별로 누적 판매대수가 많은 것은 쉐보레로 2015년 말 2억 3천만대를 돌파했고 GM 전체로는 2015년 상반기에 5억대를 넘었다. 브랜드 별로는 역사가 긴 미국 메이커가 많지만 모델 별로는 일본차가 전체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자동차산업의 구도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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