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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왜 일어났으며 피할 수 없었는가
2013. 10. 17. 13:38
해방된지 겨우 5년도 채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라는 최악의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북한은 단순히 이데올로기를 떠나 극도의 증오심을 보이며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하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아프리카 부족국가도 아니고 단일민족으로서 남북이 딱히 뿌리깊은 증오심을 가질 이유도 없음에도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던가.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으며 피할 수 없는 일이었나.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그 원인을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았지만 38선은 일본의 항복을 코앞에 앞두고 미소가 급히 그은 임시 분계선일뿐 우리 입장에서는 그 선은 어떤 역사적, 정치적 의미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이 선이 그어진 이유는 일차적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1930년대 이래 루즈벨트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대소유화론을 고집하였습니다. 그는 소련이 제국주의적인 야욕이 없으며 미소는 "약간"의 방법의 차이가 있을뿐 결국 추구하는 방향은 같다고 주장합니다. 1930년대말 소련이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동부 폴란드를 점령했으며 핀란드를 침공하고 발트 3국을 강제로 합병하자 루즈벨트를 비롯한 대소유화론자들은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루즈벨트는 여기에 대해 침묵했으며 어떤 외교적 조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히틀러가 가장 시급한 상대이라는 전략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를 떠나 일관성과 형평성이 없었으며 단지 개인적인 소련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입장은 2차대전 내내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스탈린은 테헤란 회담에서 독일의 항복과 함께 적어도 2, 3개월안에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참전을 약속했으나 막상 독일의 항복을 앞둔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는 입장을 바꾸어 극동에서 제정러시아가 누리던 모든 이권의 보장과 소련군이 필요로 하는 막대한 보급품과 차량의 지원을 요구하였고 루즈벨트는 신중한 고민도 없이 즉흥적으로 수락하였습니다. 여기서 만주와 일본에 대해서는 의논되었으나 한국에 대해서는 세력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제대로 논의조차 하지 않았으며 루즈벨트는 한국인들의 역량을 고려할때 40년정도의 신탁통치안을 스탈린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사실 미국무부에서는 루즈벨트에게 한국을 포함한 극동문제에 대해 한바구니의 보고서를 상신했으나 루즈벨트는 읽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의 참전은 결코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루즈벨트는 소련은 미국의 친구이며 전후세계 질서는 반드시 소련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했기에 소련의 대일참전을 집요하게 요구한 것 또한 실상 군사적인 이유보다 이런 정치적인 이유때문이었습니다.
루즈벨트가 죽자 부통령 트루먼은 갑작스레 대통령이 되었으나 루즈벨트와 소련이 서로 어떤 약속을 했으며 극동의 상황이 어떠한지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 그는 유럽문제와 일본에 신경쓰는 것도 벅찼습니다.
일본은 7월에 이미 항복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었고 일본의 항복은 실상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원자폭탄이 개발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일본이 항복하기전 단 며칠이라도 공격하는 시늉을 해야 극동에서 최대한 뜯어낼 여지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것이 바로 8월 폭풍작전이었습니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의 방어력은 대단히 취약했으며 국경지대에서 다소 강력한 저항이 있었을뿐 소련의 기갑부대가 최일선을 돌파하자 파죽지세로 남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하였고 일부 선발대는 개성을 건너 춘천까지 진입합니다. 트루먼은 그제서야 한반도 전체를 소련에게 넘기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하고 적당한 분계선을 정하기로 합니다. 38도선, 39도선, 40도선이 거론되었고 처음에는 39도선이 유력했으나 맥아더는 전략적으로 별 가치도 없는 한반도 따위를 점령하는데 일본 점령군을 분산시키는 것은 태평양에서 미국의 역량을 넘어서는 것이라며 반대하였고 결국 38선이 결정됩니다. 그 결정이 내려지는데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39도선이나 40도선을 제안했다해도 스탈린은 틀림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스탈린의 목적은 한반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어차피 보너스 스테이지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그의 주된 관심사는 동유럽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약간의 완충지역을 좀 더 얻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인지라 손바닥만한 땅 때문에 미국과 굳이 갈등을 빚어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소련은 마음만 먹었으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도 있었음에도 미국이 38선을 제시하자 아무 고민없이 즉석에서 ok!라고 하고 38선 이남으로 진출한 병력을 도로 북쪽으로 옮깁니다. 반면 미군은 9월 6일에야 최초의 선발대가 인천을 거쳐 서울로 입성할만큼 준비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덕분에 스탈린은 생각지도 못한 한반도 이북지역까지 획득했고(비록 그가 정말로 원했던 훗카이도는 얻지 못했지만) 극동군 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북한정권을 수립할 것과 쓸만한 놈을 골라서 추천하라고 지시합니다. 그 결과가 김일성이었죠.
1930년대부터 소련 극동군의 후원을 받아왔던 김일성은 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다른 당파들을 억누르거나 제거하고 신속하게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정권이 신속하게 안정되자 그는 남한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켜 이를 통해 남한을 흡수 통일하겠다는 전략을 세웁니다. 이때만 해도 중국에서는 한창 국공내전중이었고 북한의 군사력은 내부 치안에나 걸맞을 뿐 외침을 할 역량도 없었고 남한보다 우세하지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38선에서 국지적 도발과 함께 남한의 지하조직을 움직여 여순 순천 반란이나 제주 4.3 항쟁에 개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준비없이 성급하게 시도된 이런 공작은 모두 실패했고 이승만정권 또한 1948년 중반부터 어느 정도 안정에 접어듭니다. 이미 양측 정권의 증오심과 불신감은 극에 달했으며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맞불작전식 반격에 나섭니다. 1949년초만 해도 군사적으로 남한이 우세했기에 38선에서의 대대적인 국지적 도발은 전술적으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북한정권에 위기감을 주었을 뿐더러, 김일성은 남한이 전쟁을 도발하고 있다고 침소봉대하여 스탈린에게 적극적인 개입과 무기 원조를 요구합니다. 특히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승리하자 김일성은 팔로군 산하 조선인 군대를 북한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하였고 3개 사단 5만명에 차례로 입국합니다. 또한 1949년말부터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신형무기가 도착하면서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을 순식간에 압도하죠.
김일성은 이런 강력한 무력을 갖추게 되자 한반도에서 더이상의 유혈사태를 막는데 노력하는 대신 이를 이용해 한방에 남한을 장악하여 무력통일한다면 권위와 정통성이 취약한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결과가 아시다시피 6월 25일 새벽 4시 "폭풍"작전이었죠.
이승만의 대북강경론이나 북진통일 주장이 남북의 긴장관계를 더욱 경색시키고 미국과의 관계마저 악화시켜 미국의 군사 원조에 역효과를 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런 주장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으나 한가지 요인일뿐 근본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미국이 남한군의 무장에 인색했던 이유는 이승만의 호전적인 발언 때문이 아니라(약간의 영향은 주었겠지만) 어디까지나 미국의 정치적, 전략적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바꾸어 이승만이 입 다물고 있었다해도 미국은 남한군을 자기들 필요 이상으로 원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들과 형평성 측면에서 비교해도 남한에게 제공한 무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실제로 사실이었습니다.) 전차나 전투기를 제공해도 남한군은 이를 운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어차피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더욱이 지나치게 많은 무기를 제공하는 것은 소련이나 영국 등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을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물론 이는 소련과 중공이 북한을 얼마나 원조하는가, 기형적으로 증강되는 북한군의 전력에 대한 충분한 고려없는 일방적이고 막연한 생각일 뿐으로 미국의 정보력의 부재를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상황을 보다 정확히 알았다면 그렇게 태평하게 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가 지도자였다해도, 이승만이 링컨이나 넬슨 만델라였다고 해도 그 시점에서는 전쟁은 어차피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전쟁을 결정한 것은 이승만이 아니기 때문이니까요.
한국전쟁은 물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루즈벨트가 처음부터 한반도는 미국의 세력권이라고 못 받박았다면, 트루먼이 한반도의 가치를 보다 중요시하여 38선이 아닌 39선 또는 그 윗선을 제시했다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계획이 너무 성급하고 무모하다고 판단하여 원조에 인색했다면, 국공내전이 그렇게 빨리 끝나지 않았다면(또는 국공내전이 아예 일어나지 않았거나 장개석이 승리했다면), 미국이 소련의 제국주의적 야심을 보다 빨리 판단하여 애치슨 라인 따위의 애매모호하고 우유부단한 유화 제스쳐를 취하는 대신 강경하게 맞섰다면, 무엇보다 김일성처럼 젊고 무모하면서 성급하고 야심만 넘치는 애숭이가 소련 점령군 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눈에 들지만 않았다면 그런 참혹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어떤 의미에서 한국전쟁은 일어날 가능성보다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더 컸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사에 우연이란 없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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