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 욕심이 과했던 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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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10:44:47


99개를 갖고도 1개를 욕심낸 탐욕의 간신 김자점-2인자에게 최대 금기어는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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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2018.05.25 오전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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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점은 연산군의 유자광과 임사홍, 광해군의 이이첨과 더불어 조선의 대표적인 간신이다. 김자점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역적으로 죽었고 죽어서도 역사의 단죄를 받았다. 젊은 시절 김자점은 선비의 기개를 지니고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정도를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권력에 취하고 부귀에 눈이 멀어 끝내는 왕권에 도전하려 역모를 꾀하다 능지처참 당했고 집안은 멸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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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서 멀어지면 다 잃는다 생각한 역신

조선의 전성시대는 태종, 세종, 문종, 세조, 성종 시기다. 그리고 영조와 정조 시대 또한 제2의 전성기였다. 물론 그 시기에 문종, 예종의 단명, 단종 폐위, 사도 세자의 비극이 있었지만 그 어떤 왕조에도 이러한 비극은 존재했다. 태종의 강력한 왕권 구축, 이를 바탕으로 세종의 찬란한 업적, 세조와 성종의 균형 잡힌 통치가 돋보였고, 붕당 정치가 만연한 가운데 영조와 정조는 현군의 면모를 보였다. 그럼 조선에서 가장 민심이 이반하고 어지러웠던 시기는 언제일까. 역사학자들은 선조, 광해군, 인조의 통치기가 조선의 최대 위기였다고 손꼽는다. 이 시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초유의 전란이 있었고 이에 대처하는 군주의 능력은 낙제점이었다. 선조는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 리더의 의무를 저버렸다. 광해군은 개혁을 시도했지만 쫓겨나 그의 이상을 펼칠 수 없었다. 광해군을 반정으로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공신, 사림, 서인의 등쌀에 시달렸고 그 역시 붕당을 이용해 왕권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선조와 인조는 ‘의지박약에 의심 많고 무능력한 리더’의 표본일지 모른다. 이 같은 리더의 시기에 두 번에 걸친 전란에도 나라가 멸망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물론 선조에게는 이항복, 이덕형, 이순신, 류성룡 등의 명신이 있어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인조는 이마저도 없었다. 선조가 남겨 놓은 ‘성리학적 논리로 무장한 선비’의 모습이라는 유산도 몽땅 탕진한 시대다. 숙청과 복수가 인조 때 정점에 달했다. 그 전에도 붕당은 있었고 세력 교체는 이루어졌지만 피의 숙청보다는 사람만 바뀌는 정권 교체였다. 하지만 광해군 때부터 세력 교체는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당파는 그야말로 ‘집권 아니면 죽음’의 도식에 함몰되었다. 집권 세력의 건전한 교체를 통한 새로운 정책, 민심을 주도하는 리더십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 인조의 옆에 예외 없이 간신이 있었다. 바로 김자점이다.

그는 다른 간신과 마찬가지로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살아서는 역적으로 죽었고 죽어서도 역사의 단죄를 받았다.

초기에는 선비의 기개를 지녔고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서 정도를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권력에 취하고 부귀에 눈이 멀어 끝내는 왕권에 도전하는 역모를 꾀하다 능지처참을 당했고 집안은 멸족했다.

김자점을 향한 비난과 탄핵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김자점은 인조의 총애를 받았다. 즉 모두가 반대했지만 단 한 사람, 절대 권력인 왕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오뚝이 같은 생존 능력의 소유자였다. 광해군 시절 인목왕후 폐모론에 반대해 유배당했지만 인조반정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인조의 세자빈 간택에 반대하다 또 쫓겨났다. 그러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국방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복권되었다. 병자호란 시에는 조선의 정예병을 지휘했지만 전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남한산성으로 구원군을 내지 않아 또 쫓겨났다. 인조는 김자점을 다시 불러들였지만, 효종 즉위 후 김자점은 탄핵을 받아 귀양을 떠났다. 이처럼 김자점은 몇 번의 위기와 화려한 복귀를 거듭했다.

인조 시대는 네 개의 세력이 대립했다. 김류, 이귀 등 반정 공신 세력, 신경진, 구인후 등 반정 공신 무장 세력, 친명 정책을 표방하는 ‘청서(淸西)’ 즉 소장파 관리와 사대부 그리고 관직은 맡지 않았지만 높은 학문으로 조선의 사상을 지배했던 산림(山林) 세력이었다. 산림은 효종 즉위 후 정권의 전면에 등장한 김집, 송시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중 인조가 신뢰하거나 반대로 인조에게 충성을 다하는 조직은 없었다. 인조는 자신의 사람이 필요했다. 그 선택을 김자점이 받은 것이다.

김자점은 인조에게 무조건 충성했다. 악역을 도맡았고 인조를 위해 무고, 음해, 역모 사건을 기획했다. 그리고 인조가 직접 나서기 불편했던 인조의 장자 소현 세자의 급서와 이후 세자빈의 죽음, 세자의 세 아들 제주도 유폐 또한 김자점이 기획하고 마무리 지었다.

인조에게 김자점은 ‘충신’이었다. 시키면 무엇이든 반대하지 않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리더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김자점은 왕권과 자신의 권력을 같은 배를 탄 결사체라 판단한 것이다.

조직에서 2인자가 저지르는 착각이 바로 1인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2인자는 리더의 안녕과 권위 유지가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 평가에서 종종 한 가지를 빼놓는다. 그것은 리더가 갖는 권위가 유일한 오너 혹은 전략적 지배자라는 위치다. 1인자는 자신의 권력 일부를 잠시 2인자에게 빌려줄 뿐인데, 2인자는 ‘나 없이 1인자는 존재할 수 없다, 나에게도 이 조직의 지분이 있다, 나도 지배자다’라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김자점은 영리했지만 이를 간과했다. 그는 인조 시대에는 무사할 수 있었지만 세자 시절부터 김자점의 월권을 지켜본 효종에 의해 숙청당했다. 물론 김자점은 기회가 있었다. 인조가 효종에게 “김자점을 나처럼 대하라”고 당부했듯이 효종 역시 그의 목숨 값을 애초부터 원하지 않았다. 김자점은 명예, 관직을 버림으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는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이 다 잃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1인자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사지가 잘리는 참형을 당한 것이다. 역사는 냉혹하다. 그는 간신, 역적으로 단죄되었다. 2인자의 처세에서 가장 무서운 ‘내가 있어 이 조직이, 1인자가 존재할 수 있다’, ‘1인자를 위해 무엇이든 해내는 것이 충성’이라는 착각의 처참한 결말을 보여준 인물이 바로 김자점이다.

서인 세력의 젊은 기수, 반정으로 권력 갖다

김자점은 1588년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려 시대 명장 김방경의 후손이고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거사를 누설한 김질의 5대손이다. 한 집안에 충신과 변절자가 공존한 셈이다. 김자점은 기억력이 뛰어나고 영특해 학문적 성취가 높았다고 한다. 그는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의 학맥을 계승한 당대의 학자 묵암 성혼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김자점은 집안의 덕으로 과거 없이 벼슬길에 올라 병조좌랑이 되었다. 병조좌랑은 정6품이었지만 군무와 무관 인사를 담당하는 직책. 후에 김자점이 도원수까지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이때 군부와 맺어 둔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에 대해 여러 기록이 있는데 “김자점은 성미가 급하고 성격이 강경했으나 일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였다. 병조의 하급 관리들이 그를 매우 두려워했다”라는 언급으로 보아 젊은 시절의 김자점은 나름 강직하고 능력도 있어 주위의 신망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김자점은 서인이었다. 광해군은 이이첨을 주장으로 한 대북파와 손을 잡고 정국을 운영했다. 광해군은 영창 대군을 살해하고 인목 대비마저 폐서인으로 별궁에 가두었다. 이때 김자점은 대북파에 맞서 폐비 논의를 반대하다 조정에서 쫓겨났다. 김자점을 비롯한 서인들은 광해군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들은 반정을 선택했다. 반정 명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명나라를 저버리고 오랑캐인 후금과 통교를 하는 것, 둘째는 광해군이 형과 아우를 죽였으며 어머니인 인목 대비를 폐하는 등 인륜을 저버렸다는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김자점은 1622년 최명길, 심기원, 이귀, 김류, 신경진, 이괄과 함께 선조의 손자 능양군 이종을 왕위에 올리기로 모의했다. 1623년 김자점은 공조정랑으로 관직에 복귀했다. 그 무렵 광해군과 대북파의 영수 이이첨의 귀에 “김자점과 이귀를 중심으로 서인 세력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는 광해군에게도 보고되었지만 광해군은 즉위 초부터 계속되어 온 역모 사건에 익숙해 이 보고를 묵살했다. 김자점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상궁 김개시에게 엄청난 뇌물을 주고 그녀를 통해 광해군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23년 3월 13일, 김자점과 이괄, 이귀, 김류 등은 궁으로 진격했다. 능양군은 창덕궁으로 향했다. 당시 반정군의 세는 모두 약 2000여 명, 그리 많은 병력은 아니었다. 창덕궁에 도착하자 훈련대장 이홍립이 궁의 대문을 활짝 열었다. 광해군은 무방비 상태로 반군에 잡혔고 복권된 인목 대비는 능양군에게 옥새를 넘겼다. 이가 바로 인조이다.

반정은 성공했다. 김자점과 반정 세력은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수십 명이 참형을 당했고 수백 명이 조정에서 쫓겨났다. 서인 세력은 이제 자신들의 천하가 되었다고 판단했지만 밑바닥 민심은 반정군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백성들은 광해군에게 동류 의식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 시 왕의 역할을 한 광해군을 ‘백성과 같이 고생하며 전란을 넘긴 왕’으로 여긴 것이다. 반정군은 남인 온건파를 내각에 기용해 민심을 달랬다. 물론 무력을 담당하는 병조 판서,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 판서, 왕궁을 경비하는 호위 대장 등 중요 직책은 서인들이 차지했다.

인조는 김자점, 이귀, 김류 등 총 33명을 정사공신으로 봉하고 높은 관직과 많은 재물을 주었다. 김자점은 그 중에서도 일등 공신이 되었다. 김자점은 호조 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했다. 이제 권력의 중심, 왕의 비서실에 진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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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송파구에 있던 나루 ‘삼전도’. 인조가 병자호란 때 중국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는 장면▶인조의 복심, 권력 위해 모함의 귀신이 되다

인조가 즉위했지만 여전히 공신들 간에도 세력 다툼이 있었다. 그때 반정 공신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절대 공신이었다. 그는 반정군의 무력을 담당하며 광해군을 직접 생포해 반정을 마무리 지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2등 공신이 된 이괄은 불만이 컸다. 서인 세력은 자신의 당원이 아닌 이괄을 경계했다.

이괄은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이귀가 이괄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귀는 이괄의 아들이 역모를 꾸몄다며 모함했다. 반신반의하던 인조는 이괄의 아들을 한양으로 압송하라고 명했다. 이괄은 그야말로 분기탱천했다. 일등 공신이 되지 못한 것도, 평안도 변방으로 쫓겨나는 것도 참기 어려운데 역모죄까지 얻자, 그는 군대를 휘몰아 한양으로 진군했다.

이괄의 군대를 막을 수 있는 훈련된 군사는 없었다. 이괄은 거사 19일 만에 한양에 입성했다. 인조는 화성, 천안을 거쳐 공주로 도망갔다. 김자점은 인조를 수행했다. 한양을 점령한 이괄은 잠시 주춤했다. 그 역시 정밀한 계획으로 반란을 도모한 것이 아니었기에 ‘다음에 무엇을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임경업이 관군을 정비하고 이천에서 이괄 군대를 대파한다. 세가 불리한 것을 깨달은 이괄의 부하들은 이괄의 목을 베고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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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김자점은 예의 잔혹한 면모를 드러냈다. 감옥에 가둔 북인 약 40여 명을 모조리 죽이고 한양을 떠나자고 주장한 것이다. 북인의 집권 경험이 이괄의 무력과 연합하면 부담이 된다는 논리였다. 기자헌을 비롯한 40여 명의 북인 모두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집단 학살이었다. 반란이 진압되고 김자점은 경연특진관으로 승진해 인조의 학문 파트너가 되었다. 김자점은 어떤 직책과 상관없이 인조의 곁에 있기를 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자점이 인조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무조건의 신하’는 아니었다. 물론 자신과 당파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는 용기’가 김자점에게 남아 있었다.

인조는 세자빈 간택을 추진했다. 윤의립의 딸이 세자빈 물망에 올랐다. 윤의립은 서인이 아니었다. 서인 세력은 이를 명분으로 세워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윤의립이 이괄 반란에 가담한 윤인발의 숙부라는 이유로 세자빈 간택을 반대했다. 김자점은 이 반대 주장의 앞에 섰다. 인조는 서인 공신 세력에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감추지 못했다. 명색이 군주인데 며느리조차 자신의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 인조는 분풀이 상대로 김자점을 선택했다. 인조는 “당파의 이익만 앞세우며 불경한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김자점의 관직을 삭탈하고 사대문 밖으로 쫓아내라 명했다. 서인들이 김자점을 적극 변호해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벌이 경감되었다. 이는 인조가 공신 세력에 공표한 일종의 경고였다. 당시 조선은 군주의 나라도, 공신의 나라도 아닌 군주와 공신의 연합 정권의 나라였다. 물론 백성의 나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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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 같은 권력 욕망이 최후를 부르다

2년간 야인으로 있던 김자점이 조정에 복귀한 것은 정묘호란 때다. 1627년 후금은 명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후방을 정비하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후금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치달았다. 서인들이 “국가 위기에는 인재들이 모두 모여야 한다. 특히 김자점은 군대를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해 인조는 김자점을 불러들였다.

인조는 한양과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제 전란이 벌어지면 앞에서 백성과 군인을 지휘하는 리더의 모습을 조선 왕조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후금은 조선의 강화 제안을 수락했다. 앞으로 조선이 후금을 ‘형의 나라’로 공경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인조는 자신을 강화도까지 호종한 김자점을 신임하기 시작했고, 어사를 거쳐 한성부 판윤에 임명했다. 1633년 김자점은 도원수가 되었다. 즉 조선군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1636년 12월, 후금에서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청 태종은 14만 대군을 휘몰아 조선 땅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조선군의 전략을 꿰뚫고 있었다. 청 태종은 산성에 몸을 숨기고 수비하는 조선군을 공격하지 않고 일부 병력만 남겨 견제하고 주력 부대는 한양으로 치달았다. 청 태종과 장수들은 조선과의 전쟁에서는 왕을 잡으면 끝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임경업, 김자점이 이끄는 조선의 정예병을 우회해 계속 한양으로 진군했다.

당시 김자점은 조선군 중에서 가장 정예병인 어영청과 황해도 병력 등 총 2만 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자점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참모들이 복병전을 펼치거나 한양에서 청나라와 일전을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김자점은 그 어떤 전략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복병전으로 작은 승리를 거두자 청나라 대군을 상대로 또 복병전을 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는 김자점의 전술을 파악하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김자점 군 진영을 돌파했다. 그 사이 청나라 군 본진은 한양에 치달았다. 인조는 강화도로 갈 시간도 없었다.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각처에 근왕병을 보내라는 파발을 보냈고 특히 김자점에게는 빨리 움직이라 명령했다.

김자점은 인조의 교지를 받고 토산에서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전략을 세웠다. 그날, 청나라는 먼저 기습을 감행했다. 김자점은 산 위로 도망쳤고 몇몇 장수들이 청나라 군에 맞섰지만 상대가 되지 못했다. 김자점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겨우 몸을 피했다. 남한산성으로 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인조는 굴욕적인 패배를 선언하고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조선과 청나라는 ‘형제의 나라’에서 ‘군신의 나라’가 되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인조는 빗발치는 김자점의 탄핵을 받아들였다. 사실, 김자점은 사형이 내려져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지휘관이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김자점의 목숨만은 살려 섬으로 귀양 보냈다.

인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김자점이 사라졌지만 조정은 여전히 당파 싸움에 몰두했다. 서인은 분열했다. 김류, 이귀 등의 반정 공신파와 최명길, 김집 등 성리학으로 무장한 유림파는 대립과 갈등을 거듭했다. 인조는 관료들의 파벌 싸움과 북벌론을 주장하는 유림의 강한 압박에 지쳐 갔다. 그는 자신의 사람이 필요했다. 바로 김자점이었다. 인조는 김자점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여 호위대장에 임명했다. 서인은 물론 모든 조정 관리들이 이에 반대했지만 인조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자점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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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자를 부릴 수 있다고 착각한 2인자

조정에 돌아온 김자점은 그러나 근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적을 몰아내고 권력과 인조의 신임을 독차지할 계획을 세웠다. 기회가 왔다. 1644년, 반정 공신이며 정권의 핵심이던 좌의정 심기원의 역모 사건이 터졌다. 청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소현 세자의 장인이 죽자 소현 세자와 세자빈이 일시 귀국했다. 하지만 인조는 세자의 문상을 막았다. 인조는 소현 세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인질로 가 있으면서 청나라 문물에 감화됐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면서 ‘심기원이 인조를 폐하고 회은군을 왕위에 올리자며 역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 심기원과 회은군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미 소현 세자와 관련된 일에 심기가 상해 있었고 더구나 반정을 주도한 전력이 있는 심기원에게 또 한 번의 반정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김자점은 뒤에서 심기원의 역모 사건을 크게 만드는 여론을 조성했다. 결국 심기원, 임경업, 회은군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특히 심기원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사람들은 김자점이 자신의 라이벌 심기원을 너무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비난했다.

조정은 김자점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는 좌의정에 임명되며 낙흥부원군 봉작을 받았다. 그리고 인조와 후궁 귀인 조 씨 사이에 태어난 효명옹주를 손자 김세룡과 결혼시켰다. 왕실과 사돈이 되며 명실상부한 2인자가 된 것이다. 김자점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청나라와 교류하는 것이 대세이자 실리라는 논리를 주장하며 친청파를 이끌었다. 이는 청나라와 화친하는 것이 실리라는 국가와 백성을 위한 판단이라기보다 국내 정치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청나라의 후원을 받으려는 목적이었다. 김자점이 청나라의 역관 정명수, 이형장과 교분을 쌓으려 노력했고 그들에게 뇌물을 주며 자신의 입지를 굳힌 것이 바로 그 증거다.

1645년 2월, 조선 왕실에 일대 회오리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소현 세자가 돌아온다. 세자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바탕으로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세자가 마땅치 않았다. 그는 세자를 아들이 아닌 라이벌로 여겼다. 청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세자를 왕위에 앉히지 않을까 의심했다. 그 해 4월 23일, 소현 세자는 병석에 누웠다. 어의들은 가벼운 병이라 여겼지만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각종 처방도 무색하게 병석에 누운 지 4일 만인 4월 26일, 소현 세자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세자가 죽었음에도 인조는 너무나 태연했다. 어의에게 죄도 묻지 않았고 서둘러 장례를 치렀다. 후에 ‘인조가 소현 세자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세자의 죽음 이후 정국은 급변했다. 후계 구도가 왕실의 현안으로 떠오른 것. 여론은 소현 세자의 아들이 소현 세자의 뒤를 이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인조는 소현 세자의 동생 봉림 대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봉림 대군 아들 이연을 세손에 봉했다. 철저하게 소현 세자와 그 후손을 배척한 것이다. 이 시국에서 김자점은 인조의 속내를 읽었다. 그는 인조가 소현 세자와 세자빈은 물론 그 아들 삼형제 모두의 제거를 원한다고 판단했다. 김자점은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세자빈이 소현 세자의 죽음에 원한을 품고 인조를 독살하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세자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아들 삼형제는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모든 대신과 사간은 물론 서인들까지 인조의 명령을 반대했지만 김자점은 이를 적극 옹호하고 여론을 조성해 결국 소현 세자 일가를 멸족시켰다. 이에 영의정 김류가 물러나자 김자점이 그 자리를 이었다.

김자점은 이미 분에 넘치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권신이자 왕실의 외척, 인조의 신임 등 모자라는 것이 없었지만 그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2인자로서 완벽한 위치를 구축하고 싶었던 김자점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그것은 왕실 즉 오너가의 후계 싸움에 발을 담근 것이다. 일시적으로 김자점의 야망은 실현되었지만 그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을 간과했다. 영특한 봉림 대군의 존재를 망각한 것이다. 김자점은 소현 세자를 제거함으로써 왕위에 오를 봉림 대군이 자신의 공을 알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봉림 대군에게 김자점은 금도를 넘은 역신이었다. 봉림 대군은 왕위에 오르는 순간 김자점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1649년 봉림 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반정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집, 송시열, 김상헌 등을 중용했다. 효종은 김자점을 파직하고 강원도로 유배 보냈다. 효종은 김자점이 아무리 미워도 아버지 인조가 신임했던 중신이기에 목숨만은 살린 것이다. 김자점도 이 뜻을 알아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효종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는 이 상황을 뒤집을 카드를 꺼냈다. 바로 청나라였다.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을 통해 청나라에 효종의 북벌론을 밀고했다. 청나라는 군대를 국경에 배치하고 사신을 보냈다. 효종과 조정 대신들이 사신을 설득해 겨우 청나라의 의심을 풀 수 있었다. 효종은 김자점을 살려 둘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때 김자점이 역모를 꾀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김자점이 아들 김식을 통해 군사를 동원하고 김집, 송시열 등을 제거한 후 자신의 아들 김세룡을 왕위에 앉히겠다는 계획이었다. 단순한 반정이 아니라 이 씨 왕조를 멸하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 한 것이다. 1651년 12월 17일, 김자점은 능지처참 형에 처해졌다. 자신이 정적 심기원을 죽인 방법 그대로 당한 것이다. 이때 김자점의 나이 63세다. 조정에는 대대적인 숙청 바람이 불었다. 김자점과 공모한 귀인 조 씨는 사약을 받았고, 김자점의 손자 며느리 효명옹주는 왕족이라 사형은 면하고 섬으로 유배되었고 김자점 일파는 모두 처형당하거나 유배에 처해졌다. 그리고 김자점의 아버지와 조상들의 묘는 모두 파헤쳐지고 부관참시 당했다. 또한 아들들은 모두 사형 당하고 처와 김자점의 어머니, 첩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그야말로 일족의 멸문이었다. 이때 김자점의 10촌 친척 김대충이 황해도 해주로 가 정착했다. 그런데 그의 집안에서 인물이 탄생했다. 바로 김대충의 11대 손, 백범 김구 선생이다. 그야말로 역적의 가문에서 진정한 애국자가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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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학 | 2인자에게 최대 금기어는 ‘도전’

김자점은 초기에는 강직하고 평판도 좋았다. 일처리는 완벽했고 능력도 있었다. 그가 희대의 간신이 된 것은 인조의 무능과 약점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에게 유일한 목표는 왕으로 죽는 것이었다. 인조는 나라의 부강, 백성의 안녕보다 왕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였다.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보통의 왕이라면 청나라에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꿈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조는 두 번의 전란에 지쳐 ‘북벌’ ‘친명’ 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대부들은 친청파를 매국노라 비난했지만 인조는 상관없었다. 광해군이 보여준 명나라, 후금과의 중립적인 외교를 통해 국가의 실리를 얻겠다는 전략 같은 것도 애초부터 없었다.

인조에게는 충신이나 기개 있는 관리보다는 자신의 뜻을 잘 파악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부역자’가 필요했다. 김자점 역시 이를 잘 알고 인조가 원하는 것을 처리했다. 많은 정적을 역모로 몰아 숙청하고 소현 세자와 세자빈, 세자의 아들들을 잔인하고 모질게 처리하도록 주장한 것도 인조의 속내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손자를 부마로 만들어 왕실과 인연을 맺었고 정치적 목적으로 같은 반정 공신까지 역모로 처형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사실 이 정도까지는 어떤 정권의 2인자라도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실제 역모를 꾀했다. 효종에 의해 권력에서 멀어지자 그는 자신이 1인자가 될 생각을 했다.

김자점은 반정으로 왕을 세우고, 권력을 독차지하고, 국정을 농단하면서 자신이 마치 1인자라고 생각했다. 수십 년 동안 1인자의 입을 통해서 나온 지시와 명령이 자신이 생각하고 인조와 상의한 결과였기에 김자점은 1인자의 권위와 명령이 자신의 것과 동일하다고 착각한 것이다. 물론 김자점의 이러한 오판은 인조였기에 가능했다. 김자점과 인조는 목적이 같았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었다. 인조는 김자점에게 권력과 부를, 김자점은 인조에게 왕좌 유지를 보장했다. 하지만 김자점은 효종을 자신이 조종했던 1인자와 같은 수준일 것이라고 오판했다.

김자점은 사실 자신의 권력을 내놓는 대가로 목숨과 재산을 지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랜 2인자의 눈으로 보아온 1인자의 자리를 그저 한 칸만 위로 올라가면 자신의 것이 되리라 판단했다. 실제 반정을 꾀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이 조종했던 무능한 1인자가 아니었다. 효종은 영특하고 비범한 군주였고, 세자 시절부터 김자점의 월권과 탐욕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쩌면 효종이 쳐 놓은 넓은 그물에 김자점이 걸려 든 것이다.

역사에서 2인자는 ‘자기 집 안방에서 죽으면 다행’인 위치이다. 수많은 2인자들이 야망과 월권으로 1인자의 견제에 의해 죽었고, 또 많은 2인자들이 그 자리에 올라서고 싶은 3인자, 4인자에게 탄핵받고, 숙청당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욕망 때문이다. 즉 99개를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1개를 더 얻어 100개를 채우고 싶은 ‘완벽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2인자가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성공한 2인자는 99개를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한 이들이다. 이들은 1개의 부족함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현명한 2인자인 것이다.

김자점은 1개를 더 채우기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였고, 왕권에 도전했다. 김자점은 ‘할 수 있는 도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그가 인조의 죽음과 함께 은퇴를 선언하고 초야에 묻혔다면, 효종 역시 아버지의 중신을 기어코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2인자에게 ‘도전’이라는 단어는 금기어다. 2인자는 그 어떠한 경우라도 1인자의 자리에 앉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왕이 귀여워하는 부마가 편전에서 호기심으로 왕의 자리에 잠깐 앉은 것만으로도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은 기록도 있다. 이를테면 차장이 부장 부재 시 잠깐 앉아보는 것은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리고 발까지 책상 위에 올려 놓는다면 어떨까. 이를 그저 호기심과 장난으로 여길 부장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2인자는 가진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다. 그중 제1항목이 바로 1인자에게 ‘도전’의 느낌을 주는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위키미디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30호 (18.05.29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