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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귀족 김헌창의 좌절...온실 속 화초는 잡초에 진다│인터비즈
2018. 8. 8. 17:55
[DBR/동아비즈니스리뷰] 신라 하대에 발생한 많은 쿠데타 중 제일 규모도 크고 극적인 사건으로 김헌창의 난을 꼽는다. 부친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있던 김헌창은 822년 자신이 도독으로 있던 웅천주(지금의 공주)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킨다. 김헌창은 많은 지지 세력을 가지고도 조정군에 각개격파를 허용했고 난공불락의 요새인 삼년산성을 어처구니 없이 빼앗긴다. 결국 반란은 그의 자살로 끝을 맺고 만다. 김헌창의 난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말기증후군에 빠진 신라
신라의 역사는 흔히 상대, 중대, 하대로 분류된다. 건국해서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소위 신라의 극적인 성장기가 상대, 통일 후 행복하게 살았던 시대가 중대, 쇠망기로 접어드는 때가 하대다. 하대의 시작은 혜공왕(765~780)부터로 잡는다. 비상식적 대립의 시작은 내전이었다. 768년 7월 96각간(角干)의 난이 터졌다. 각간은 당시 신라 최고의 품계로 신라 왕족 중에서 최고위층 인사들을 지칭한다. 통일 후 이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로 확산돼 살고 있었는데, 수도 서라벌에서 각간 대공과 동생 아찬 대렴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33일간 포위하자 전국의 신라 왕족들도 두 패로 나뉘어 전투를 벌였다. 혜공왕은 반군을 진압하고 왕좌를 지켰지만 한번 무너진 신라 왕족의 단합과 내란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이후로 신라는 긴 권력투쟁에 빠져들었고 쿠데타와 내전이 빈발했다. 국가와 지배층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신라의 정치와 신라 왕족으로 제한되는 좁은 권력구조 및 폐쇄적인 신분제, 비효율적인 국가 운영 방식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치솟았다. 그러나 신라의 지배층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전혀 쇄신을 하지 못했다.
김헌창은 왜 지방으로 내쳐질 수밖에 없었나
김헌창은 신라 정계의 최고 실력자였다. 태종 무열왕의 후손으로, 김헌창의 아버지인 김주원은 재상 가운데 으뜸인 상재상을 지닌 신라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선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다음 왕으로 김헌창의 부친 김주원이 내정됐다. 하지만, 바로 궁으로 와서 즉위해야 하는 상황에 비로 알천이 범람해 김주원은 하천을 건너지 못했다. 그러자 왕좌를 오래 비워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김주원의 이복형제 또는 사촌으로 추정되는 김경신이 원성왕(38대 왕)으로 즉위해 버렸다. 두 세력이 혈연적으로 너무 가깝고 세력 균형이 팽팽했기 때문에 알천 범람 같은 사소한 사건이 왕위를 가른 것이다.
부친은 왕위를 뺏겼지만, 김헌창은 그 후로도 신라 정계의 일인자로 살았다. 원성왕계 후손들의 분열과 복잡한 권력구조 덕분이었다. 그러나 왕들의 입장에서 보면 껄끄럽긴 했던 모양이다. 그는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시중을 지냈지만 시중으로 재임한 기간은 짧았고 주로 지방의 총독인 도독을 맡았다. 왕들은 김헌창을 지방으로 내보내도 한 곳에 오래 두면 자기 세력을 양성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자주 재임지를 바꿨다. 그런데 이 방식이 역효과를 낳았다.
김헌창이 반기를 들자 전국의 수령들이 가세하다
신라 정계에서 원래 국왕급의 세력을 가진 인물을 이렇게 내돌리면 전국 곳곳에 자기 세력을 양성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 왕들은 김헌창뿐 아니라 좀 위험하거나 자기 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인사들을 가차 없이 외관으로 내보냈다. 김헌창은 불만 세력들이 전국의 수령으로 쫙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지방관으로 지내며 처참히 고통받는 백성들 역시 돌아보게 됐다.
부친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데 불만을 갖고 있던 김헌창은 822년 3월 웅천주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나라 이름은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의미에서 장안국이라고 지었다. 김헌창이 건국의 깃발을 들자 전국의 수령들이 그에 가세했다. 상주, 충주, 청주, 김해, 보은, 성주, 진주의 수령이 모두 김헌창에게 가담했다. 이 지점을 지도에 표시하면, 소백산맥 안쪽에서 충청, 경상도의 낙동강 서쪽, 전라도로 진출하는 도로상의 요충이 모두 해당한다. 신라의 절반이 김헌창의 편에 섰다. 신라는 완전히 포위·고립됐다.
신라군의 반격...삼년산성의 함락
김헌창군이 신라로 들어오는 모든 중요 지역을 장악했다는 건 그 어느 쪽으로도 치고 들어올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때 겁에 질린 신라의 지휘관이 똑같이 전방위로 병력을 배치했다면, 신라의 영역이 장안국의 장악 지역보다 넓지 않은 상황에서 필패했을 것이다. 다행히 신라의 지휘부는 이 함정에 빠지지 않고 과감한 반격을 시도했다. 가용 병력을 모두 서라벌로 끌어모아 서라벌 수비대만을 편성하고 나머지 병력으로는 돌파를 시도했다. 신라는 군을 셋으로 나눠 김헌창군의 주요 요충을 각개 격파한 후 최종적으로 웅천주로 진격하기로 했다.
이 작전에서 제일 걸림돌이 보은에 위치한 삼년산성이었다. 삼년산성은 신라가 한참 약했을 때 신라를 지켜준 위대한 요새였다. 이 중요한 성이 반군 편에 넘어갔다. 신라군으로서는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반란 진압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토벌군이 지지부진하면 반군 세력은 눈덩이처럼 확장된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신라군의 공격에 삼년산성이 손쉽게 떨어졌다. 삼년산성의 유일무이한 패전이었다. 신라군은 웅천주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패배를 자인한 김헌창은 자살했다. 신라의 절반을 장악했던 기세가 무안하게 그의 반란은 1년도 가지 못하고 진압되고 말았다. 대체 김헌창의 난은 왜 실패한 걸까?
온실 속 화초였던 김헌창...귀족형 리더가 흔히 빠지는 실수
김헌창의 반란은 귀족형 반란의 전형이다. 귀족은 모험을 할 줄 모르고 전쟁과 바둑을 혼동해 상황판의 판세에만 집착한다. 김헌창은 넓은 지역을 장악했고, 많은 세력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의 군사적 역량은 현저히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김헌창은 병력을 완전히 분산시켰고, 그로 인해 각개 격파를 허용했다. 기본적인 수비대만 있었어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던 삼년산성에 병력을 투입하지 않는 우를 범해 난공불락의 요새를 단박에 내주었다.
김헌창뿐 아니라 귀족형 반군, 귀족형 리더는 전쟁에서 이런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인 이유는 온실에서 자란 탓이다. 어려서부터 주변 사람들이 보살펴 주고 자기 세계와 환경이 자체의 틀에서 완벽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훈련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도 자기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이는 비단 귀족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독점적 기업, 안정된 상황, 매커니즘이 나무랄 데 없이 잘 돌아가는 조직일수록 자기 세계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는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잡초에게 반드시 진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05호
필자 임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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