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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1 12:28:52
"반대 없는 개혁은 없다"...개혁의 열쇠는 ‘반대파도 수긍할 명분’│인터비즈
[DBR/동아비즈니스리뷰] 반대 없는 개혁은 없다. 조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때로는 과감히 반대파와의 갈등도 감수하며 설득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명분'이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송당 조준(松堂 趙浚, 1346∼1405)은 조선 초기 문란했던 토지제도를 바로 잡기 위해 '과전법(科田法)' 개혁에 나서야 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토지문제는 민생안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결 과제였지만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어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였다. 조준은 과연 어떻게 반대파도 수긍할 만한 '명분'을 만들어 내어 개혁을 완수했을까?
조선시대 토지는 국가의 근간 ... 불가피했던 토지 개혁
오늘날에도 토지는 중요한 ‘재산권의 객체’지만 전통 사회에서 그 비중은 더욱 컸다. 토지가 거의 유일한 생산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고 신분을 결정짓는 일들이 모두 토지를 매개로 이뤄졌고, 토지의 분배·소유·사용 형식이 곧 국가 체제의 성격을 결정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조준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고려 말기에는 그토록 중요한 토지제도가 매우 어지러웠다. 토지의 공적인 의미가 사라졌고 지배층의 이익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고려시대의 토지제도 전시과(田柴科, 고려시대의 토지제도)는 기본적으로 국가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그 직위에 해당하는 토지를 분급하는 체제다. 이들이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나면 토지는 국가에 환속되어야 하는데 이를 반납하지 않고 사유화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기에 무신정권의 집권자들, 권문세족 등이 ‘토지겸병(土地兼并, 불법적으로 토지를 넓힘. 지배층이 일반민들에게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강제로 빼앗는 경우가 많았음.)’을 자행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조준의 설명을 살펴보자.
“토지를 나눠주고 회수하는 법이 무너지고 겸병이 판을 치니 재상이 돼 (녹봉으로) 밭 3백결을 받아야 할 자가 송곳 세울 만한 땅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실을 호위하고 외적을 방비할 군사의 옷, 양식, 무기가 모두 토지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그것을 감당할 비용이 없습니다. … 사전(私田)이 다툼의 씨앗이 돼 관련자들로 감옥이 가득하고 판결을 기다리느라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토지를 요구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원한을 품습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이러한데 하물며 형제간이야 어떻겠습니까? 사전으로 인해 인륜이 금수와 같아진 것입니다.”
조준에 보기에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사롭게 소유한 토지, 즉 ‘사전’에 있었다. 사전이 확대되면서 전쟁에 나갈 군인이나 새로 관리가 된 사람, 심지어 일국의 재상에게까지도 지급할 토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국가를 위해 일하고, 국가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겠냐고 의문을 던진다. 또한 토지 분쟁이 증가하면서 지방 행정력이 낭비되고 있으며 사전을 두고 부모와 자식, 형제가 다투고 있다고 한탄했다.
개혁의 시작은 과거의 사례와 의제를 체크하는 것부터
제도의 개혁이 필요했다. 그러나 어떤 프로그램을 바꾸기 위해서는 일단 먼저 ‘프로그램 레퍼토리(program repertory, 정책 목록)’ 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개혁하고자 하는 대상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례와 관련해 과거, 혹은 다른 집단에서 채택했던 프로그램 목록을 확인해야 한다. 여기에는 개혁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정보까지 담겨 있으므로 새로운 개혁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데 유용한 도움을 준다. 조준은 ‘프로그램 레퍼토리’ 중에서 고려 태조의 토지제도 프로그램을 롤모델로 선택했다.
조준은 ‘공무를 맡는 자에게 토지를 분급하고’ ‘사적인 토지교환을 금지하는’ 것을 토지개혁의 2대 원칙으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1) 토지의 수조액(收租額, 토지에 대한 세금)을 1결당 쌀 20두로 낮추고 2) 관료에게는 품계에 따라 토지를 분급하되 그 직을 그만둘 경우 곧바로 토지를 반납하도록 하며 3) 1결이라도 적게 반납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4) 군전(軍田, 고려·조선 시대 군인에게 지급했던 토지)은 20세에 받고 60세에 국가에 반환하도록 하는 등의 세세한 시행 방안을 마련했다.
조준의 개혁안이 주로 토지 환수절차를 엄격하고 투명하게 운용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구상하는 공전적(公田的) 토지제도의 성공은 결국 토지에 대한 소유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어하느냐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소망성'이 담긴 명분을 잡아야 반대파가 움직인다
이와 같은 조준의 개혁은 기득권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된다. 기득권이 막대한 이익과 부를 자발적으로 포기할 리가 만무했다. 심지어 조준과 같은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집단 내부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사대부들의 정신적 지주 이색(李穡)은 “법을 경솔히 개혁할 수 없다”고 했으며 그를 따르던 관리들도 토지를 ‘겸병’ 하는 것이 문제지 ‘사유’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책이 진정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구성원들을 설득해 새 정책에 동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준이 토지개혁의 ‘정책 목표’로 ‘인정(仁政)의 실현’을 내세운 것은 주목할 만하다. 우선 ‘정책 목표’란 “현재는 존재하지 않으나 정책을 통해 미래에 있어서 발생하도록 하고자 하는 상태, 정책 추진을 통해서 구현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상태(desirable state)”를 말한다. 즉, 정책 목표에는 어떠한 상태를 이룩하고자 하는 ‘소망성(desirability)’이 담겨야 한다. 이 소망성이 바람직할 때 ‘정책 대상 집단’의 순응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정책 피해집단’의 반발을 줄일 수 있다.
‘인정’은 바로 조준의 토지개혁정책이 가진 ‘소망성’이었다. 맹자가 처음으로 제시한 개념인 인정은 유교정치사상의 핵심 이념이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民惟邦本]’라는 인식 아래 백성을 교화해 착한 본성을 고양하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인정은 정책적 구체성을 갖기보다는 일종의 도덕적 이상이자 선언(宣言)이다. 아무리 대의(大義)를 전면에 내세운다고 해도 그것이 추진하는 개혁과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그냥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준이 인정을 정책 목표로 삼은 것은 누구나 다 동의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 원칙을 내세우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준은 “국가의 운명은 백성들의 삶이 괴로운 상태냐, 즐거운 상태냐에 달려 있다”며 국가를 가진 이는 마땅히 경계(經界=境界)를 인정(仁政)의 시초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무릇 인정은 반드시 경계로부터 시작한다”는 맹자의 말을 재확인한 것인데, 인정의 실현이라는 정책 목표는 민생안정을 통해 이뤄질 수 있고, 민생안정은 토지 개혁을 통해 가능하다고 정리한 것이다.
요컨대 조준의 정책은 ‘하위 목표 또는 정책 수단(토지제도 개혁)’→‘상위 목표(민생안정)’→‘최종 목표(인정의 실현)’로 구조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토지제도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인정(仁政)을 실현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절대적 대의인 인정을 거부하는 것을 보니 참된 유학자(관리)라고 할 수 없다”라는 공격이 가능하다. 실제로 반대파들은 ‘인정’이라는 당위성을 내세우며 토지 개혁을 관철하려는 조준에게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구성원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좋은 개혁
이상 조준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명분의 중요성이다. 어떤 대상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실현 가능한 최선의 대안을 찾은 다음, 반대집단의 저항을 극복하고 구성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가’에만 집중하면서 그 수단에 힘을 실어주는 명분을 놓치곤 한다. 반대파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명분, 대의와 원칙을 가져와 자신의 논리로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개혁을 성공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점은 오늘날의 기업이 참고할 만하다.
* 이 글은 DBR 8월 호 <개혁의 열쇠는 ‘반대파도 수긍할 명분’>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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