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 중국은 왜 식민지가 되지 않았나

2022. 10. 15. 14:54Finance, 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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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인물, 사건으로 보는 중국 현대사 > 22화 - 워싱턴 체제

2016. 11. 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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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중국은 식민지가 되지 않았나

1937년 7월 7일, 이른바 "7.7사변" 또는 "루거우차오사건(蘆溝橋事件)"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이 전면적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초반의 압도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8년이나 지지부진한 가운데 결국 연합군의 공격으로 패망하고 만다. 군사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무너지지 않고 항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1928년 12월 전국을 통일한 장제스 정권이 이후 약 10여년 동안 야심차게 추진했던 전후 부흥과 군을 현대화한 성과가 있었다.

장제스는 반 독립적인 군벌들에 대하여 무력토벌과 함께 정치적인 타협을 병행함으로서 난징 정권의 일원으로 끌어들여 국내를 안정시켰다. 또한 "폐량개원(廢兩改元)"과 "폐제개혁(幣制改革)"으로 청말 이래 난립했던 수많은 화폐를 정리하여 국제 시장에서 중국 화폐의 신용도를 높이고 중국의 경제권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그리고 독일 군사고문단을 영입하여 중앙군을 중심으로 군대를 현대적으로 개혁하였다.

이른바 "독일식 사단" 1934년부터 1938년까지 진행된 중독 합작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군의 현대화였다. 일본의 군사제도를 모방했지만 근본적으로 봉건적인 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북양군대와 달리, 장제스는 직계 부대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나마 현대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비록 시간적 촉박함과 재정적 한계, 내부적인 문제로 장제스의 군제 개혁이 "군사혁명"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8년 항쟁"의 물적 토대를 만들었다.

덕분에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지연시켰다. 또한 서부 변경의 충칭으로 밀려난 뒤에도 장제스는 여전히 통치 역량이 흔들리지 않은 채 전쟁을 지휘할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중일전쟁 초반에 주요 정치적 기반인 상하이, 난징을 빼앗긴 시점에서 장제스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어 중국은 수많은 친일 군벌이 난립하는 시대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동안 마오쩌둥에 의해 장제스 정권의 성과가 평가절하된 면이 있지만 중국 현대사에서 그의 기여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만약 장제스가 아니라 다른 군벌이 중국을 통일했다고 해서 반드시 똑같은 길을 걸었을까. 또한 일본의 침략이 1937년이 아니라 중국이 분열된 1920년대 초반이었다면 어떠했을까.

1920년대만 해도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격차는 청일전쟁 이래 최악이었다. 봉건적인 군벌들이 지휘하는 중국군은 어떤 군대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머릿수만 많을 뿐 무기와 장비도 불충분했으며 훈련과 사기도 형편없는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청일전쟁 당시 청군과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장쉐량의 동북군은 장제스의 중앙군을 제외하고 여러 군벌 군대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우수했지만 만주사변과 러허사변 당시 관동군의 공격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더욱이 장쭤린, 돤치루이를 비롯한 대표적인 군벌들은 물론이고, 많은 관료, 정치인들이 친일파로서 일본과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위안스카이가 일본과 밀실야합으로 체결한 21개조 조약이나 돤치루이 정권의 산둥 반도 할양이다. 뒤늦게 이 사실이 공개되자 격분한 중국 민중은 5.4운동을 일으켜 군벌들의 매국적 행태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이미 빼앗긴 주권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과연 이런 친일 군벌들에게 일본의 침략에 저항할 의지를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편전쟁이나 청일전쟁을 재현하는 꼴이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여 메이지 유신 이래 일관되게 대륙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일본이 어째서 가장 좋은 기회를 노리지 않았을까. 그보다도 왜 중국은 인도나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첫째로 중국은 아무리 노쇠했다고 해도 여전히 너무 크고 강성한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봉건적인 토호국들이 난립하여 중앙의 힘이 매우 취약했던 무굴 제국과 달리, 청은 신해혁명으로 무너질 때까지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실효적으로 지배하였다. 제아무리 열강이라도 혼자의 힘으로 중국 전체를 정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영토의 병합이나 무력 점령 대신 자유 무역과 특권적 지위를 통해 경제적인 침투를 도모하였다.

두번째는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며 무력도 불사하던 19세기 이전과 달리, 19세기 말에 오면서 신흥 강국 독일과 러시아, 미국, 일본의 등장으로 국제 정치가 훨씬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열강들은 상호 동맹을 맺고 세력 균형을 추구하면서 지나친 식민지 쟁탈이 무력 충돌로 이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1898년의 "파쇼다 사건(Fashoda Incident)"이다. 수단을 놓고 영국의 횡단 정책과 프랑스의 종단 정책이 충돌하면서 일촉즉발까지 갔지만 독일을 견제하는데 영국의 협력이 필요했던 프랑스가 알아서 물러나면서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자 세력 균형을 깨뜨릴지 모른다고 우려한 구미 열강들이 공동 전선을 구축하여 일본을 압박하였고 결국 일본은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구미 열강들은 중국에 대하여 "공동 지배"와 "기회의 균등"이라는 룰을 암묵적으로 만들어 내었다. 어느 나라도 중국에서 배타적인 독점권을 누릴 수 없었다. 각국은 상하이, 난징, 톈진 등 주요 도시에 균등하게 조계를 설치하고 세력권을 평화적으로 나눔으로서 서로의 충돌을 최소화하였다. "의화단의 난"처럼 군대를 출동시킬 일이 있어도 공동으로 출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중국 내에서 열강들의 세력은 균형을 이루었고 어느 한 나라가 지나치게 팽창하는 일을 견제하였다. 이런 모습은 한 세기 이전 인도와 북미를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무력으로 충돌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미국은 열강들이 중국 내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하는 것을 반대하고 중국의 주권과 영토권의 보장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거부했다기보다는 후발주자로서 중국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서 열강들의 배타적인 세력권에 반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8개국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미국 역시 2천여명의 병력을 출동시킨 것을 보더라도 중국 침략에 결코 소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열강들은 어느 한나라가 중국으로부터 특권을 획득하면 반드시 자신들도 똑같이 그 특권을 공유하려 들었다. 또한 굳이 단독으로 행동하여 다른 나라들의 반발을 사기보다는 "룰"을 지키는 것이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톈진의 조계에서 공동으로 경비중인 일본군 병사와 프랑스군 병사

또한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누리기 위해서는 기존 체제가 지탱되어야 하므로 이를 위협하는 시도는 억제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열강들이 이를 기회삼아 청조를 무너뜨리는 대신 오히려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용병 부대를 조직하여 청군을 지원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신해혁명에서도 열강들은 거의 마지막까지 청조를 지지하였고 위안스카이와 쑨원이 남북 화해에 타협하고 열강들의 이익을 보장하자 비로소 지지를 철회하였다. 중국의 주권과 지위는 오직 열강들의 세력 균형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질서는 제1차 세계대전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독일과 제정 러시아는 붕괴되었고 비록 승전했지만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프랑스는 더 이상 독자적인 열강으로서의 역량을 상실했으며 영국 역시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남은 나라는 미국과 일본 뿐이었다.

* 일본과 영, 미의 모순

여러 열강 중에서도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가장 인접한 나라는 일본이다. 러일전쟁 이후 랴오둥 반도를 조차하고 남만주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누렸으며 한반도를 병합하여 국경을 맞대었다. 따라서 안보적인 측면에서라도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최대 무역 상대국이자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으로서 경제적 가치, 군부의 제국주의적 영토욕이 결합하면서 중국 침략에 대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게 되었다.

일본에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구미 열강들의 영향력이 축소된 것을 이용하여 위안스카이 정권에게 21개조 조약을 강요하고 산둥 반도를 비롯하여 독일, 오스트리아가 누렸던 이권을 넘겨받는 등 막대한 이익을 차지하였다. 또한 제정 러시아의 세력권이었던 북만주로 진출하는 등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비약적으로 확대하였다. 특히 구미 열강의 자본이 중국에서 철수하자 재정난에 허덕이던 북양 정권은 일본의 차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어 종속적인 관계로 전락하였다.

일본의 팽창은 그동안 유지되어 온 중국에 대한 "세력 균형"과 "기회 균등"의 원칙을 깨뜨린 셈이었다. 또한 태평양에서는 마리아나 제도, 케롤라인 제도 등 독일령 도서들을 점령하고 위임통치령으로 삼았으며, 러시아에서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하여 연해주와 북부 사할린을 점령하였다.

구미 열강들이 쇠락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1854년 이른바 "페리 제독의 흑선 사건"으로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은 극동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 함께 일본을 지원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지출한 군비는 약 19억 8천만엔에 달했으며 그 중에서 약 60%인 12억 엔이 영, 미가 제공한 것이었다. 당시 대장성 대신이었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가 전비 조달을 위해 당시 일본 은행 부총재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를 미국에 보내면서 "해외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면 일본은 붕괴된다"라고 오열했을 만큼 일본의 재정 상황은 극도로 궁핍하였다. 미국이 2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일본의 전쟁 국채를 사주지 않았다면 러일전쟁에서 백기를 든 쪽은 일본이었을 것이다. 또한 1905년 7월 29일에는 가츠라-테프트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을 체결하여 한반도 병합을 묵인하는 등 극동에서 일본의 지위를 인정하였다. 극동의 변방에 불과했던 일본이 개국한지 50여년만에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세력이 급격하게 팽창하자 미국에게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위협이 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만주의 철도 건설을 놓고 테프트 행정부가 "달러 외교(Dollar Diplomacy)"로 만주 진출에 나서자 오히려 러시아와 일본이 협력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이 사건을 통하여 미국은 일본이 더 이상 "귀여운 똘마니"가 아닌 "만만찮은 강자"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양국은 오랜 협력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모순이 있었다. 일본의 개항은 그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미국의 함포 외교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더욱이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은 불평등조약이었다. "존왕 양이파"였던 메이지 유신 세력들이 도리어 개국파로 전향하여 서구를 배우려 나선 것은 진정으로 서구를 동경해서가 아니라 힘의 격차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배우고 익혀서 서구를 능가할 때까지만 잠시 머리를 숙이겠다는 일종의 방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은 일본 사회의 반감을 더욱 부추겼다. 일본인 이민자들이 주로 정착하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1913년 5월 토지 규제법을 신설하여 일본인들의 이민을 억제하였다. 이 사건은 미-일 양국의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켰으며 한때 전쟁을 준비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구미열강들이 만들어 낸 국제 질서에 대한 후발주자로서 불만, 서구에 대한 불신감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피해자"로 여기게 하였다. 그들은 서구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의 지도 아래 유색 인종이 단결해야 한다는 이른바 "大아시아주의"를 외치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소위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편협하고 왜곡된 사상으로 현실화되게 된다.

시베리아 출병을 놓고도 양국은 충돌하였다. 1918년 8월 러시아에서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백군측의 체코군단을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미·일·영·불 4개국은 "간섭전쟁"을 결의하였다. 연합군의 편성은 당초 2만 5천여명 규모로, 그 중에서 일본은 1개 사단 1만2천여명을 파견키로 했으나 데라우치 내각은 동부 시베리아를 장악할 호기로 생각하고 9개 사단 7만5천여명에 달하는 대군을 출동시켰다. 또한 고지마 소지로(児島惣次郎) 중장이 지휘하는 가라후토州파견군(가라후토=사할린, 보병 제13여단 및 헌병대로 구성)을 조직하여 북부 사할린을 점령하였다. 일본이 블라디보스톡을 비롯해 바이칼 호수 동쪽의 광대한 지역과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하고 괴뢰정권을 수립하는 등 영구적인 점령을 꾀하자 미국은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블라디보스톡을 행진 중인 일본군. 일본 참모본부는 간섭전쟁을 기회삼아 동부 시베리아를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게다가 1919년 여름에 오면서 볼세비키 군의 반격으로 콜차크(Aleksandr Kolchak)가 이끄는 백군이 대패하였고 11월 14일 수도 옴스크가 함락되는 등 전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미국과 영국 등 다른 연합군은 철수를 결정했음에도 이미 깊숙이 개입하여 막대한 물적, 인적 자원을 소모하고 있었던 일본은 발을 빼지 못한 채 오히려 제13사단을 증파하고 미군이 철수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1920년 4월 6일에는 "극동공화국(Far Eastern Republic)"이라는 괴뢰 정권을 수립하였다. 또한 6월 28일에는 사할린 북부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하지만 소련이 적백내전에 승리하면서 일본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1922년 6월 23일 철병을 결의하였고 10월 말까지 북부 사할린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병력을 철수시켰다. 1925년 5월에는 북부 사할린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아사이 신문 기자였던 이토 마사노리(伊藤正德)가 태평양전쟁 직후에 출간한 <국방사(國防史)>에서 "결국 어느 하나도 얻은 것 없이 철수하게 된 비참한 대사건"이라고 논평했을 만큼 시베리아 출병은 메이지 이래 일본이 저지른 최악의 실패였다. 10억 엔에 달하는 전비와 연 인원 10만명이 넘는 파병, 3천여명의 전사자를 내었지만 일본이 얻은 성과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더욱이 군부의 전횡을 억제하려던 하라 다카시 총리(原敬)는 우익 세력의 후원을 받는 괴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 헌정 역사에서 현직 총리가 암살당한 첫번째 사례였다.

시베리아 출병에서 보여준 일본의 독단적인 행태는 미국과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한 것이므로 거센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은 21개 조약이나 산둥 반도의 점령에 대해서도 중국의 주권과 미국의 이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승인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미국의 요구는 부당한 내정 간섭이라고 여겼다. 미국이나 영국 역시 많은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고 동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을 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일본에게만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라느니, 민족 자결의 원칙을 지키라느니 따위는 이율배반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1923년 2월 제국국방방침을 수립하면서 소련, 중국과 함께 미국을 제1가상적으로 규정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미국과의 전쟁을 가정한 예가 없지는 않았으나 해군이 예산을 타내기 위한 수단일 뿐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시점에 와서 일본이 주된 가상 적국으로 미국을 상정하게 된 것은 그만큼 군부의 반미 감정이 격앙되었다는 의미였다. 미국 역시 일본에 대한 깊은 불신감을 가지고 대일 전쟁에 대비하여 "오렌지 계획(War Plan Orange)"을 수립하게 된다.

영국으로서도 일본의 팽창 주의는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었다. 러시아와 독일의 위협에서 극동을 방어하기 위해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했던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 동양함대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본의 출병을 요청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반응은 영국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적극적이었다. 영국은 일본군의 작전 범위를 산둥성의 독일 조차지와 중국 근해로 제한하기를 원했지만 일본은 이를 기회삼아 중국은 물론 태평양 전역으로 확대하여 남태평양의 독일 식민지들을 장악하였다. 이것은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 등 태평양에 있는 여러 영연방 국가들에게 중대한 위협이었다.

또한 영국이 유럽전쟁에 총력을 기울이는 동안 일본은 중국 시장을 장악하였다. 아편전쟁 이래 중국과 극동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영국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는 커녕 이대로라면 극동에서 완전히 물러나야 할 판이었다. 러시아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키워주었던 일본이 이제는 오히려 더 큰 위협이 된 것이다. 1902년 이래 20여년 동안 유지되었던 영일동맹은 1923년 8월 17일을 기하여 만료되었고 양국의 협력 관계 또한 완전히 끝장났다. 영국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접근하게 된다.

파리 강화 조약을 체결할 당시에만 해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산둥 반도의 반환을 놓고 중국의 열망을 무시하고 일본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었던 영국과 미국의 태도는 그 직후부터 급격하게 경색되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일본이 더 이상 독주하지 못하도록 견제에 나섰다. 이것이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워싱턴 회의(Washington Conference)가 열리게 된 배경이다.

*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

워싱턴 회의라고 한다면 흔히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Washington Conference on Disarmament)" 을 떠올리게 된다. 19세기 이래 열강들 사이에서 벌어지던 건함 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되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재정난과 군비 축소의 여론에 따라 주요 해군국이 해군 군축을 논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의 또 한가지 주된 의제는 바로 중국에 대한 것이었다.

열강들의 해군 군축과 중국 문제는 얼핏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같아도 실제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왜냐하면 독일이 몰락한 뒤 건함 경쟁은 영국과 미국, 일본이 주도하면서 태평양에서의 주도권 싸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해군 군축 조약에 참여한 나머지 두 나라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해군력은 앞의 삼국에 비하면 한참 미치지 못하였다. 즉, 해군 군축의 궁극적인 목적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현상을 유지하면서 경쟁을 완화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영, 미, 일 삼국의 이해 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얽혀 있는 중국 문제를 매듭짓지 않는다면 아무리 해군 군축에 합의한들 중국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이기에 결국 군비 증강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워싱턴 회의에서 중국 문제를 다루게 된 이유이다.

1921년 12월 13일 미국·영국·프랑스·일본 사이에서 유효기간 10년의 "4개국 조약"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태평양에서의 현상 유지와 영일 동맹의 폐기였다. 영국과 일본은 영일 동맹을 존속시키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리라 판단했지만 미국의 완강한 반대와 앞서 언급한 서로의 모순과 갈등에 부딪치면서 결국 폐기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비록 4개국 조약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하더라도 남양군도를 비롯하여 그동안 태평양에서 일본이 획득한 기존 권익을 보장받은 점과 영국과 미국이 당장 공동 전선을 구축하여 일본 견제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함께 중국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1921년 11월 16일부터 극동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국·영국·프랑스·일본 외에 당사자인 중국과 이탈리아, 포르투칼, 벨기에, 네덜란드 등 9개 국가가 참여하였다. 중국쪽에서는 북양정부의 외교총장 옌후이칭(顏惠慶), 주미 대사 스자오지(施肇基), 쿠웨이진(顧維鈞), 왕정팅(王正廷) 등이 전권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들은 중국의 주권, 독립의 보장과 영토 보존, 불평등 조약의 개정, 중국의 중립국으로서의 지위 존중, 태평양과 극동에서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관세 자주권, 21개조 조약의 취소, 치외법권 폐지와 불평등 조약의 개정 등 10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열강들은 중국의 요구를 검토하여 자국의 기존 권익을 보장하는 선에서 일부 받아들여 1922년 2월 6일 이른바 "9개국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서 중국에 대한 열강들의 침략 행위나 새로운 권익을 강요하는 등의 행위는 금지되었다. 

1921년 11월 21일 워싱턴 메모리얼 컨티넨탈 홀에서 5대 해군국이 참여한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 모습

일본은 이전에 위안스카이 정권과 체결했던 21개조 조약의 일부를 포기해야 했다. 1898년 독일에게 강압적으로 빼앗긴 이래 중국 민중의 오랜 숙원이었던 산둥 반도는 드디어 중국의 품에 돌아왔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얻어낸 각종 특수 권익과 독점적 지위 또한 부정되었다. 물론 21개 조약 전체가 폐기된 것은 아니며 관동주의 조차와 남만주철도의 운영권, 산림 광산 채굴권 등 만주에 대한 주요 권익은 여전히 보장되었다. 일본으로서는 그동안 막대한 피를 흘리며 간신히 얻어낸 권리를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 미도 굳이 일본에게 그 이상의 권리를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다. 워싱턴 회의는 어디까지나 현상 유지를 전제로 열강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함이지, 윌슨이 말하는 민족자결이나 중국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기 일본 국내에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란 다이쇼 천황 시절에 나타난 민주주의 운동이다.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은 외형적으로는 부국강병을 이룩했지만 국민과는 철저하게 괴리되어 있었다. 근대화의 단물은 소수의 관료, 기업가만이 맛볼 수 있었고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오히려 에도 막부 시절보다도 궁핍하였다. 이런 근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끝없는 침략 전쟁과 과중한 군비는 국민들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쌀값이 폭등하자 전국 각지에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노동자, 농민들이 쌀 도매상을 습격하는 "쌀 파동"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본의 국내 사정이 극도로 불안정해지자 권력집단도 일정부분 타협하지 않을 수 없어 보통선거의 실시와 정당 정치를 약속해야 했다.

또한 군부의 힘이 일시적으로 약화되면서 러일전쟁 이래 외부의 가상적인 위협을 내세워 끝없이 늘어나던 군비도 대폭 제한되었다. 일본 대표단이 워싱턴 회의에 참여하여 군축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국내의 반전(反戰) 여론 때문이었다. 해군은 한창 건조중이던 4만톤급 전함 토사(土佐)를 비롯하여 4척의 전함을 폐기 조치하였다. 또한 육군대신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는 1922년부터 23년까지 대대적인 군축을 단행하여 약 6만명을 감축하였고 1925년에도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가 "우가키 군축"을 단행하여 4개 사단 3만 5천명을 감축하였다. 청일전쟁 이래 끝없이 확장되었던 일본 육군이 3년 사이 10만명 가까운 인원이 축소된 것이다. 중국에 대한 침략 역시 잠시나마 중단되면서 일본 정부는 한동안 불간섭주의를 고수하였다. 혼란기의 중국에게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사회가 점차 보수화되면서 6년 뒤인 1928년 5월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은 산둥 출병을 단행하였다. 또한 세계 대공황과 만주사변을 계기로 구미 열강들 또한 일본의 중국 침략을 사실상 묵인하게 된다.

어쨌거나 워싱턴 회의에서 최대의 승자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워싱턴 회의를 통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열강으로서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해군 군함 회담 결과 주력함 비율에서 미국과 영국을 1로 본다면 일본이 0.6,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0.175를 할당받았다. 비록 일본은 영국, 미국의 60% 선에 불과했지만 이 두나라는 해군을 전 세계로 분산해야 한다는 전략적인 약점이 있었다. 유사시 모든 해군력을 한 곳에 집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태평양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일본이 우세했다.

냉철하게 말하여 경제력이 열세한 일본으로서는 굳이 전체 규모에서 영, 미와 대등할 필요는 없다. 전 세계 곳곳에 식민지와 이권이 걸려 있는 영, 미와 달리 일본의 세력권은 오직 극동과 태평양에만 국한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본의 해군 교리는 일본 근해에서 적 함대를 요격하여 결전한다는 것이므로 자국 영해에서의 우세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다. 이것은 당대 세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미국의 해군 전략가 알프레드 마한(Alfred Thayer Mahan) 제독이 "해양전략이론"을 제창하면서 "지리의 중요성"과 "병력의 집중"을 강조했던 사실것에 충실히 따른 것으로, 일본 해군은 바이블로 삼았다. 반면, 20세기 초반 독일은 대륙국가이기에 해양국가인 영국과 대등한 해군력을 건설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카이저의 자존심을 세우는데 급급하여 무리한 건함 경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영국을 프랑스과 결탁하도록 만든데다 군비와 자원을 불필요하게 낭비하였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퇴하였다.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과 영국은 일본보다 우세한 해군력을 확보할 수 없게 된데다, 홍콩, 괌, 필리핀 등에 대해서도 요새화할 수 없었기에 전략적으로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영, 미가 힘을 합치면 충분히 일본을 견제할 수 있지만 이들 역시 서로에 대한 이견과 모순이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댓가는 뒷날 진주만에서 톡톡히 치루게 된다.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5대 상임이사국의 위치에 올라선데다 영, 미 다음의 지위를 확보하면서 위세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중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태평양 문제에서 일본을 제외하고는 감히 논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일본 군부를 비롯한 우익 강경파들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못했다. 오히려 구미 열강들이 일본의 권익을 부당하게 침해한다며 불만을 품었다. 이들은 워싱턴 체제가 일본을 모욕했다고 여기고 와신상담하여 훗날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에 나서게 된다. 만주사변은 워싱턴 체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아시아 태평양의 현상유지"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지만 세계 대공황의 충격, 세계 주도국가로서의 역할과 전통적인 고립주의 노선 사이에서 원칙없이 왔다갔다 하던 미국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묵인하함으로서 일본의 팽창 노선을 방관하였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독일의 승리에 편승하여 보다 파멸적인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즉, 워싱턴 체제는 잠깐의 평화를 보장했을 뿐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이로부터 20여년 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전, 미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은 주미 일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한다. 이른바 "헐 노트(Hull note)"라고 부르는 내용은 미국, 일본이 함께 조인했던 "9개국 조약"의 원칙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도죠 히데키는 "대미 개전은 미국의 부당한 압력 때문이며 자존자위를 위한 부득이한 전쟁"이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이 먼저 9개국 조약을 위반했다는 점에서 어불성설이었다.

워싱턴 회의에는 우리 독립 운동가들도 참여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대표단을 구성하여 파견한 것이다. 당시 "외교 독립론"을 제창하던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 자결 원칙을 굳게 믿고 워싱턴 회의에 참석하여 우리 독립 의지를 보여주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반대파들은 이미 파리 강화 회담에서 민족 자결 원칙이 얼마나 허울 뿐인지 충분히 증명된 바라며 쓸데없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고 비판하는 등 독립 세력 내에서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상하이 임시정부의 인사들은 이승만이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천재일우의 기회는 아니더라도 일말의 기대를 걸고 이승만을 단장으로, 서재필을 부단장으로 대표단을 구성하였다. 또한 미국 민주당 출신으로 前 상원의원이었던 토마스(C.S.Thomas)가 고문을 맡아 미국 대표단에게 한국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제출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국제적 지위는 너무나 공고해져서 도저히 도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국 대표단은 워싱턴 회의 사무국에 전국 13개 도 지역대표 373명이 서명한 독립 청원서를 제출되었지만 일본측 대표단은 "위조"라고 주장하였고 열강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일본을 제외한 8개 대표단을 상대로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이승만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주변을 서성이며 배회해야 했다. 따라서 워싱턴 회의는 냉엄한 현실만 재확인한 꼴이 되었다.

더욱이 1920년 4월의 연해주 참변,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등 열강들의 복잡한 이해 관계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 독립 단체들의 분열 속에서 독립 투쟁의 역량은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 회의가 성과없이 끝난 것은 그나마 실날같은 희망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을 비롯한 각료들은 총사직을 선언하였다. 게다가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던 많은 인사들이 "더 이상 독립의 가능성은 없다"라며 자포자기하여 친일로 전향하였다. 독립 단체들이 내부 분열을 일으키면서 상하이 임시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는 등 대일 투쟁은 고사하고 존폐의 위기에 직면하였고 우리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내내 침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의 태반이 대부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공산 혁명에 뛰어들었다. 구미 열강들이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한국의 독립을 외면하는 이상 그들로서는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상대는 反제국주의를 표방하는 소련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 계열은 거의 괴멸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나마 김구, 김원봉 등 몇몇 지도자의 열의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사건이 계기가 되어 중국의 지도자였던 장제스가 우리의 독립 의지를 다시 돌아보게 되면서 불길은 되살아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