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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史] 장제스 타이완으로 향하다 - 14. 한국전쟁, 미 7함대 타이완으로 출동하다
2015. 7. 6. 18:05
https://blog.naver.com/atena02/220412012651
"우리는 국제적으로 구립무원의 상태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만일 중공이 타이완을 먼저 진공해 오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한 또한 국제 공산주의자들의 침투와 무장 유격대의 협공으로 어려움에 처할 것입니다. 반대로 국제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먼저 공격한다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이 투입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위기에서 벗어날 한줄기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 1949년 6월 29일 샤오위린(邵毓麟) 초대 주한대사의 정세 분석에서.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장제스는 운동과 명상을 끝내고 막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장징궈가 급히 들어왔다. "너는 무슨 급한 일로 그렇게 바쁘냐?" 장제스에게 장징궈는 한장의 보고서를 내밀었다. 서둘러 만든 것이지만 내용은 분명했다. "조선전쟁 발발!" 한반도에서 김일성이 지휘하는 공산 군대가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공격한 것이다. 장제스는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소리쳤다. "우리들의 때가 올 것이다(我們的時機可能要來了!)"
한국전쟁은 한민족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장제스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구세주였다. 공산군의 타이완 침공이 임박했지만 미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공에게 타이완을 넘기고 양국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눈치가 역력하였다. 중국백서(China White Paper, United States Relations with China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Period 1944–1949)를 작성하여 장제스 정권의 몰락을 전적으로 장제스의 무능과 부패 탓으로 돌려 여론을 호도하고 미국의 정책적 오류를 덮었던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은 1950년 1월 10일 워싱턴의 미국신문기자협회(National Press Club)에서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면서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은 알류산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극동에서 미국의 세력권을 의미하였다. 또한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미국은 보장할 수 없으며 자신의 안보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소위 "애치슨 라인( Acheson Line)"에 남한과 타이완, 인도차이나는 빠져 있었다. 이 나라들은 공산진영으로부터 극도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38선에서는 남북한의 호전적인 지도자들에 의해 치열한 전투가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었고 노쇠한 대국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들의 맹렬한 공격에 시달렸다. 타이완 반대편에서는 중공군이 침공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다. 힘의 균형이 공산진영으로 한쪽으로 쏠리면서 미국의 동맹국들이 자력으로 버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미국은 어떠한 직접적인 개입도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고 군사적 원조를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한편, 전차와 군함, 항공기의 판매조차 엄격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막상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은 즉각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하여 무력 개입을 결정하였다. 일본에서 출격한 미 공군이 서울 상공에 나타나 북한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이고 7월 1일에는 미군 선발대인 스미스 부대가 부산에 상륙했다. 타이완에 대한 태도 또한 돌변하였다. 6월 27일 사세보항에 주둔한 제7함대 일부가 타이완 해협으로 출동하였다. 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수송함 1척으로 구성된 미 함대는 타이완 해협을 순찰하면서 통제권을 장악하였고 제13항공대가 타이완에 배치되었다. 그토록 장제스가 바라던 상황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타이완은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남한과 타이완이 공격을 받아도 불개입을 외쳤던 미국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어째서 종전의 입장을 180도 뒤집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미국 내부의 변화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전후 동원 해제와 군비 감축으로 미국의 군사력은 대폭 축소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1천2백만명에 달했던 미군은 1948년 6월에는 육군 10개 사단 55만명, 해군 42만명, 해병대 8만명, 공군 39만명 등 144만명에 불과했다. 국방비 역시 1945년 812억 달러에서 1948년 118억 달러로 감소하였다. 특히 일본에 주둔한 미 극동군은 4개 사단 108,500명에 불과한데다, 병력과 장비 역시 정수에 턱없이 미치지 못했으며 훈련 상태도 엉망이었다. 반면, 소련군은 동원 해제에도 불구하고 약 430만명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미군은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는 이상 소련에 대한 우위는 변함이 없다고 여겼다.
1948년 4월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리스에서도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주의 게릴라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미소의 갈등이 악화되자 1948년 11월 23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소련을 가상 적으로 삼은 전쟁 수행 계획(NSC20)을 수립하고, 1949년 4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서유럽 집단안보체제인 나토가 결성되었다. 1949년 8월 29일에는 카자흐스탄 사막에서 소련의 첫번째 핵실험이 실시되었다. 소련 최초의 핵폭탄인 RDS-1는 4년 전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팻맨"의 복제판으로 위력까지 똑같았다. 이로서 미국의 핵독점은 4년만에 깨졌다.
미국 정보부는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성공하려면 적어도 5년에서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여겼다. 너무 안이했던 것이다. 또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던 세계 유일의 전략 폭격기인 B-29를 복제하여 Tu-4 폭격기를 제작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독일을 항복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개발한 무기가 어처구니없게도 이제는 미국의 목젖을 위협하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미국은 급히 재래식 군사력의 확충에 나섰다. 1949년 17만명이 증강되어 161만명으로 확대되었고 국방비 역시 1949년 136억 달러에서 1950년에는 140억 달러로 늘어났다. 하지만 핵독점이 깨졌다고 해서 당장 미국의 안보 전략이 바뀌지는 않았다. 1950년 6월 당시 미국은 150~200발의 핵을 보유하였고 핵탄두를 탑재한 장거리 폭격기 250대를 보유하였다. 또한 다수의 목표에 동시 다발적인 공격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는 막 핵실험에 성공했을 뿐인 소련에 비해 절대적인 핵우위였다. 이런 믿음 아래 미국의 국방비 증강은 완만했으며 병력 역시 일시 증가되었다가 경제 불황과 의회의 반발로 인해 도로 146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 전체를 지킬 역량은 없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으로 대소 봉쇄를 주도했던 조지 캐넌(George F. Kennan)은 미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곳으로 세개의 지역을 선정하였다. 영국과 라인 방어선, 그리고 일본이었다. 이 곳은 어떤 희생을 치뤄서라도 지켜야 하지만 그 바깥은 미국의 역량으로는 장담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애치슨의 발언 역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애치슨의 연설 직후에 국무부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대소 온건파였던 조지 캐넌이 은퇴하면서 강경파인 폴 니츠(Paul Nitze)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폴 니츠는 소련이 세계 공산화 정책을 꾀하고 있으며 괴뢰국가를 앞세워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침략을 감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그와 함께 국무부 극동 정책팀에 참여한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와 딘 러스크(Dean Rusk) 역시 트루먼에게 남한과 타이완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미국의 극동 정책이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었다. 4월 12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수립된 NSC-68에서는 대소봉쇄를 더욱 강화하고 소련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로 규정하였다. 또한 트루먼 행정부는 그동안 경제 불황으로 150억 달러 이상의 국방비를 책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으나 경제 담당자들이 바뀌면서 유사시 적어도 400~50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하는 군비 증강 계획이 입안되었다.
트루먼 행정부의 한반도와 타이완 정책이 불간섭에서 적극 개입으로 바뀐 것 또한 하루 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바뀐 것이 아니라 이런 맥락에 있었다. 이는 한국전쟁 직전의 변화였다. 우리로서는 다행한 일이지만, 바꾸어 만약 김일성이 남침계획을 반년에서 3개월만 당겼더라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타이완 역시 버려졌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트루먼 행정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동안 미국에 핵우위가 있는 이상, 소련이 꼭두각시 정권에 불과한 북한을 앞세워 무모한 전쟁을 일으킬 리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김일성의 남침은 미국에게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맞먹을 만큼 완전히 허를 찔린 것이었다. 미국은 정권을 잡은지 얼마 안된 김일성이 남침을 주도했을 리 없으며 진짜 전쟁의 장본인은 소련과 중공이라고 믿었다.
정황적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1949년 말부터 소련은 북한에 전차와 항공기 등 대규모 무기를 원조하였고 중공 역시 조선족으로 편성된 부대를 대거 입북시켰다. 남만주의 선양과 창춘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단(제164사단, 제166사단) 2만 1천여명이 1949년 7월부터 8월까지 북한으로 넘어갔다. 제164사단은 북한군 제5사단으로, 제166사단은 제6사단으로 개편되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3개 사단에서 5개 사단으로 일거에 늘어난데다 풍부한 실전경험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군사력의 추는 단숨에 북한쪽으로 기울었다. 1950년 4월에도 제165사단 1만 5천여명이 북한으로 넘어가 제7사단으로 개편되었다. 한국전쟁 직후까지 입북한 조선인 부대는 6만명 이상이었다. 이들은 입북에 동시에 북한군복으로 갈아입고 북한군의 중핵이 되었다.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공격의 선봉에 선 이들은 다름아닌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중공군 출신 부대였다.
만약 소련이 남한 침공을 주도했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소련이 단순히 남한을 정복하는데 목적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남한은 그만한 가치가 없었다. 진짜 목적은 일본일 가능성이 높았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시아 전체의 적화에 있다고 분석하였다. 한국전쟁을 단순한 내전이 아닌, 침략전쟁으로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트루먼은 한국에 대한 개입을 결정하면서, 한반도와 동떨어진 타이완과 인도차이나에 대해서도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상식에 기초한 판단이었다. 게다가 막연한 선입관에서 접근했을 뿐, 소련과 중공, 북한 사이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나 김일성이 결코 단순한 소련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남침에 얼마나 개입했는가. 냉전 시절의 전통적인 사관에서는 정황적인 증거를 내세워 한국전쟁은 소련의 공산화 정책의 일환이며 스탈린과 마오쩌둥, 김일성 세 사람이 전쟁계획을 모의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구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정부가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한국전쟁의 전모가 밝혀졌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지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적인 야심에 불타던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철저하게 배제당했다.
국공내전 과정에서 북한은 중공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막대한 무기와 군수품을 제공하고 의용군을 파병하는 등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이것이 양측의 긴밀한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북한의 중공 지원은 당시 북한을 장악하고 있던 소련의 전략이지 김일성이 직접 주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경계하고 견제하는데 급급하였다. 소련을 등에 업고 정권을 차지한 그로서는 중공의 영향력이 커지면 박헌영을 비롯한 북한 정권 내 친중파들이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1949년 4월 28일 김일성이 민족보위상 부상(국방차관)인 김일(金一)을 베이징으로 보내어 국공내전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북한의 남침계획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마오쩌둥은 "시기상조"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김일성은 미적지근한 마오쩌둥의 반응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는 굳이 중공의 도움은 필요없다고 여겼고 어디까지나 스탈린을 상대로 전쟁을 논의했다.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요청을 수락하고 조선인 3개 사단을 입북시킨 이유 역시 처음부터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할 목적은 아니었다. 당시 38선에서는 남북한 사이의 무력 충돌이 격화되고 있었고 이때만 해도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는 쪽은 남한이었다. 이승만은 여순 순천 반란과 제주 4.3 사건 등 남한 사회의 혼란이 북한의 책동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국내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1949년 초부터 38선 일대에서 대대적인 국지적 공세에 나섰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어 남한군의 전력을 과장하면서 당장이라도 이승만이 38선을 넘어 북침을 할 지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며 무기와 군수품, 병력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마오쩌둥은 약 100만명에 달하는 대대적인 병력 감축과 재편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국공내전 말기 공산군은 약 550만명에 달했고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형편에 과도한 군비 지출로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병사들 역시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마오쩌둥은 조선인 부대를 북한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원론적으로 동의했을 뿐, 여전히 주저하고 있던 스탈린은 남침의 전제 조건으로 반드시 마오쩌둥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하며 만약 마오쩌둥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남침을 연기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일성은 마지못해 5월 14일 비밀리에 베이징으로 가서 마오쩌둥을 만났다. 두 사람의 회견은 극비였기에 그 자리에서 나눈 대화는 나중에 박헌영과 저우언라이가 주중 소련대사 로신(N. V. Roshin)을 통해 모스크바에 보고한 내용이 서로 상반된다. 박헌영은 마오쩌둥이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어차피 통일은 평화로운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또한 한반도처럼 작은 영토를 위해 미국이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라면서 김일성의 남침을 지지하였고, 일본군이 한반도에 상륙한다면 중공도 개입할 것을 약속했다고 보고하였다.
저우언라이의 보고는 다르다. 그는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경고하고 이에 대해 대비하려고 조언했으며, 또한 미국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중국은 관여하지 않겠지만 38선을 넘으면 반드시 개입하겠다고 하자 김일성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해 했다고 하였다.
누구의 말이 맞을 것인가. 어느 쪽이건 마오쩌둥이 원칙적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원칙적으로 동의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속내는 스탈린이 이미 남침을 승인했다면 자신의 동의는 한낱 요식 행위일 뿐이며, 굳이 이 문제에 자신이 끼어들어 스탈린과 김일성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또한 김일성의 일방적인 설명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전쟁 계획이나 스탈린이 어째서 자신의 동의를 받으라고 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반면, 교활한 스탈린은 김일성 때문에 미국과 정면 대결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만약 미국이 개입했을 때 중공을 방패막이로 써먹으려는 속셈이었다.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만남은 화기애애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대가를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톡톡하게 치루게 되었다.
▲ 김일성과 마오쩌둥.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지원한 대가로 타이완을 잃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틀 뒤 미 제7함대가 타이완 해협에 진입하자 다음날 오전 외교부장 저우언라이는 "중국에 대한 무력 침공이며 유엔 헌장을 정면으로 위배한 행위"라며 미국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마오쩌둥은 급히 중공 최고 지도부 회의라 할 수 있는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8차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자리에는 공산당 수뇌부 외에도 쑹칭링을 비롯한 비공산계열의 민주당파와 무당파 인사들도 참여하였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은 미국이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타이완 해협에 함대를 출동시킨 것은 중국에 대한 내정간섭이자 침략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중국 인민은 미 제국주의의 어떤 도전도 타파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저우언라이 등 극소수의 측근 이외에는 한국전쟁 직전에 마오쩌둥과 김일성이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에 대해 전혀 알리 없는 대다수 참석자들은 마오쩌둥의 말을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트루먼이 타이완 해협에 제7함대를 보낸 것이나, 마오쩌둥이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본 것은 실상 양측의 막연한 두려움과 상대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국은 공산 진영이 타이완을 넘어 일본과 태평양을 침략할지 모른다고 여겼고, 중공은 반대로 미국이 한국전쟁을 빌미로 장제스와 손을 잡고 중국 대륙을 침략할 것이라고 보았다. 내전 과정에서 미국의 이중적인 행동으로 여러 번 뒷통수를 맞은 적이 있었던 마오쩌둥은 남한과 타이완의 방위를 포기한다는 애치슨의 연설을 미국이 내미는 화해 제스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위장 전술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말자 트루먼 행정부가 자신의 말을 180도 뒤집고 장제스 정권을 다시 지원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의 의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트루먼 행정부 역시 전적으로 자신들의 시각에서 중공을 바라보았다. 트루먼이 타이완 해협에 함대를 보낸 것은 타이완을 방어하기 위함이었지, 아직도 대륙 반공이라는 허황된 꿈을 버리지 않는 장제스 정권을 돕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제7함대의 타이완 파견을 명령하면서도 이것이 장제스 정권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든 장제스에게 '동전 한닢'도 주지 않을 것이다." 또한 타이완 문제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유엔에 의해 결정될 사안이라고 말했다.
즉, 제7함대의 파견은 장제스 정권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타이완의 전략적 가치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의 보호는 오직 타이완 본도에만 국한되었고 국민정부가 장악하고 있던 진먼다오나 마쭈도와 같은 도서 연해는 해당되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돌파를 놓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하더라도 중공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들이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단정하였다. 하지만 이런 결정이 중공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타이완과 만주, 인도차이나 삼방향에서 중국을 침공할 것이라고 극도의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고 "인민지원군"을 편성하여 소위 "항미원조전쟁"을 시작하였다.
결국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벌어진 상황은 외교 채널이 단절된 상황에서 미-중 양국 지도부가 주변 정황과 자신들의 선입관만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이로 인해 냉전은 더욱 격화되었고 한국전쟁에 중공이 개입하면서 한반도의 통일은 멀어졌다. 3년에 걸친 전쟁에서 한민족은 물론 미국과 중국 역시 엄청난 물적, 인적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또한 타이완 해방을 중국 혁명의 마지막 투쟁이라고 여겼던 중공은 그 꿈을 접어야 했다.
▲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이로서 미국과 중공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다.
훗날에야 양쪽 모두 상대의 의중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성급한 오판"이었다고 인정하였다. 한국전쟁에서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잃은 마오쩌둥은 1956년 9월 23일 베이징을 방문한 아나스타스 미코얀(Anastas Mikoyan) 소련 부수상과의 회동에서 "전쟁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스탈린이 책임져야 한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스탈린과 김일성이 자신에게 남침 일자와 전쟁 계획을 철저하게 숨겼으며 그들이 이미 결정한 사안에 반대해 봐야 소용이 없었기에 마지못해 찬성했을 뿐이라며 한국전쟁에 끌려들어간 것을 후회하였다.
기대가 허망하게 깨진 것은 장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순히 미국의 보호가 아니라 대륙으로의 복귀를 원했다. 타이완은 잠깐의 도피처일 뿐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중일전쟁에서 미국 등 주변 강대국들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기대하였다. 6월 25일 당일 직접 이승만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의 남침은 소련의 음모"라고 강조하면서, 긴급 수뇌부 회의를 열어 한반도로의 병력 파견을 논의하였다. 군부는 병력과 군비가 부족하고 타이완의 방위가 취약해진다는 점을 들어 파병에 반대한 반면, 외교부는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장제스 역시 병력부족을 우려하면서도 "같은 반공국가"라는 점을 들어 파병을 고집하였다.
논쟁 끝에 장제스는 3개 사단으로 구성된 제52군 3만3천명과 1개 수송 비행대(C-47 수송기 20대)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제52군은 제13사단과 제67사단, 제201사단으로 편성되었다. 3개 사단 모두 국민정부군 최강 부대로, 제67사단은 덩부다오(登步島)에서, 제201사단은 진먼다오에서 공산군의 침입을 격퇴하고 승리한 전적이 있었다. '한국지원파병사령관'에는 제67군장 류리안위(劉廉一) 중장이 임명되었다. 또한 전군의 외박과 휴가 중지와 대륙에 대한 정찰을 강화할 것, 국민들의 해외 출국 및 외화 유출의 금지를 지시하였다.
하지만 그의 파병 계획은 트루먼에 의해 거부되었다. 맥아더는 주일미군의 병력 부족을 이유로 장제스의 파병 제안을 환영했지만, 트루먼은 타이완군의 전투력이 낮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미국의 부담만 늘릴 뿐이라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장제스가 이를 빌미로 전쟁을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으로 확대하려는 속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타이완이 파병을 강행한다면 중공도 개입할 우려가 있어다. 물론 유엔 16개 회원국이 많건 적건 파병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같은 상임이사국인 타이완의 파병만 보이콧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 역시 "한국은 병력이 충분하며 무기만 부족할 뿐"이라며 타이완의 파병을 탐탁지 않게 여기자 장제스는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1950년 11월 대규모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참전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내세워 타이완의 파병을 보이콧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정세 변화였다. 게다가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참패하여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장제스는 이승만과 맥아더에게 서신을 보내어 파병을 다시 제안하는 한편, 미국 ABC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반도에 상륙한다면 베이징의 통제를 받고 있는 많은 국부군 출신 부대들이 즉각 넘어올 것이며 대륙에 있는 150만 유격대들과 인민들의 호응을 얻어 대륙을 수복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또한 맥아더는 만주 폭격과 중국 대륙으로의 확전을 외치면서도 막상 장제스에게는 "때를 기다려야 하며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며 선을 그었다.
실상 미국의 전략은 대륙 수복이 아니라 타이완을 중국 대륙에서 분리시키고 "현상유지"를 고착화하여 중공의 견제와 서태평양 방어의 최일선으로 활용하는데 있었다. 장제스가 중국 대륙을 공격한다면 소련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었고 미국 또한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것은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시나리오였다. 중국은 타이완을 공격해서도 안되고 장제스 역시 타이완에 조용히 머물러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입장을 중국과 타이완 양쪽에게 분명하게 밝히지도 않은 채 애매모호한 태도만 고수하였다. 미국 관료들의 말은 조석으로 바뀌었다. 마오쩌둥과 장제스 모두 미국의 의중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마오쩌둥은 마오쩌둥대로 타이완 침공을 포기해야 했고, 장제스는 장제스대로 미국의 보호는 받되 그 대가로 종속적인 관계로 전락하였다. 또한 타이완 해협은 몇번이나 긴장관계에 놓여야 했다.
이것은 미국이 철저하게 자국의 이해관계만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떤 국가이건 자국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미국은 자신들과 동맹국의 이익이 상충하면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고려하여 윈윈하는 절충선을 찾기보다는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자신들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고수하였다.
이것이 국공내전 내내 미국의 대중 정책이며 실상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미국식 외교 정책이기도 하다. 이는 우리에게도 시시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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