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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이전 대원군과 고종의 국방정책과 그 한계
2011. 8. 31. 18:29
https://blog.naver.com/atena02/100136840468
흔히 조선의 군사제도를 가지고 "오랜 평화로 인해 문란해 졌다"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그렇다쳐도 국방의 중요성이 부각된 정묘, 병자호란의 참패와 삼전도의 굴욕은 설명이 되지 않죠. 더욱이 명종때는 일개 소규모 도적떼에 불과한 임꺽정일당에게 한양이 함락되느니 따위의 말이 나올정도로 치안과 군사력 공백을 겪었습니다. 허약했던 조선의 군사력은 오랜 평화때문도, 어느 한시대만의 문제도 아니며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국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국방에 대한 마인드와 무엇보다 재정의 열악함에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효종을 비롯해 군사력 강화를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필요한 군사제도 그자체를 개혁하고 그에 필요한 재정 확충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전체를 바꾸는 혁명적인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런 움직임들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고 시간이 지나면 금새 흐지부지되기 일쑤였습니다.
중앙군을 이루는 훈련도감과 5군영은 집권층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그때그때에 따라 확대되었다 축소되었다 했는데 어느 한 군영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병력과 재원을 마련하기 보다 "윗돌 빼고 아랫돌 괜다"라는 말처럼 무슨 젠카놀이하듯 다른 군영에서 빼내어 채워넣었습니다. 그러니 전체적인 군사력 강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죠. 오히려 군영끼리 파벌싸움과 알력다툼만 심화되었습니다.(어느 줄을 서는가가 생존의 문제이니)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국왕과 집권층의 권력 유지를 위한 물리적 기반으로서의 필요성이지 외적의 방어와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중앙군도 재정을 이유로 갈수록 축소하였으며 빈자리를 무급인 지방향병의 번상으로 채웠으며 이조차도 상번하지 않는 대신 포를 바치는 것으로 대신토록 합니다. 중앙군의 역할은 유사시를 대비한 상비군이 아니라 궁궐의 경비와 입직, 순라를 위한 것이 되었죠.
19세기초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에 있어서 가장 큰 반란이었지만, 이런 일에도 불구하고 군사력 강화는 추진되지 않았고 되려 재정난을 이유로 지방군은 더욱 축소되었고 중앙군은 수도 방어는 고사하고 궁궐 경비조차도 어려운 지경이 됩니다. 당연히 기강도 형편없어 헌종때는 숙위병들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일조차 있을 정도였습니다. 역대 집권층의 국방에 대한 사고는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는 선의 소규모 상비군(궁궐 경비대)과 병농일치제에 있었습니다.
대원군이 집권했을때 중앙군의 군사력은 훈련도감의 3천명, 어영청과 금위영의 250명 등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대부분이 노약자에다 총기와 장비도 녹슬어 거의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각 병영은 재정결핍으로 최소한의 경비와 봉급조차 체불되었으며 무기의 제조도 완전히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장교들은 봉급 체불로 공금을 멋대로 유용하기까지 합니다.(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조총만 해도 전국에 십만정이 넘었다고 하지만 실상 쓸 수 있는 것은 수백정에 불과했습니다.(훈련도감대장 신헌의 상소)
이런 상황에서 조선말 대원군의 군사력 증강은 상당히 괄목할만한 것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직후부터 군비 강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병인양요에서 호되게 "아작"난후 공전의 위기감을 느끼고 그야말로 국방에 총력을 기하죠.
그의 국방정책은 이전 집권층들과 달리 단순하게 일회성의 친위대 양성이 아니라, 중앙군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전반적으로 정비하였고 한양과 강화도 등 경기 북부의 방위를 강화합니다. 또한 수도방위만이 아니라 그동안 버려진 것과 다름없던 지방군과 海防까지 노력을 기울입니다. 병인양요당시 겨우 속오군 400명이 주둔하던 강화도는 3천명으로 증강됩니다. 문관들이 독식해 왔던 병조와 삼군부의 고위직에 무관들을 임명하여 무관들의 사기를 높입니다. 가장 중요한 재정확보에 대해서도 도성문세, 상품유통세, 상선세같은 새로운 세원을 다양하게 신설하여 병조와 각 병영의 재정을 안정시킵니다.
대원군은 특히 "포군의 정예화"를 추진하였는데, 1866년부터 무과에 화포과를 신설하고 포군들의 처우를 적극 개선합니다. 이덕분에 사실상 와해되어 있던 포수들이 1865년부터 활발하게 재정비되어 1865년~1874년까지 전국의 포군은 약 3만명에 달합니다. 물론 3만명은 교대로 입번했기에 항상 이런 숫자의 상비군이 상시 유지된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군적에 이름만 올려놓던 것과 달리 정기적인 급료의 지급과 매일 또는 매월 엄격한 훈련으로 전투력을 유지시킵니다. 화약과 총탄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각 지역에서 화약과 총탄도 대량으로 제조합니다. 가령 1872년 6월 남양 대부진에서만 화약 6천근과 총탄 4만개를 제조하여 삼군부에 상납하였죠.
이로 인해 대원군 말기 조선의 군사력은 상당히 정비되어 조정 스스로 "연해와 변경에 돈대[墩臺]가 줄지어 있고, 병영의 무기가 정비되었으며 군선과 화포에 이르기까지 모두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자찬할 정도가 됩니다.
그럼에도 대원군의 군사력 강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던 것은 결국 재정의 한계와 정작 지방군의 주축인 속오군에 대해서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3만에 달하는 포군의 급료만도 호조의 1년 세입과 맞먹을 정도였고 이는 당시 정부 재정의 궁핍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근본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원군은 나름대로 국세로 들어오던 세원의 일부를 지방세로 돌려 포군의 유지비용으로 충당케 하고, 심지어 지방 수령이 자기 봉급을 털어 보충하기도 합니다만 이런 방법으로는 당연히 언발에 오줌 누기 격밖에 될 수가 없었죠. 어렵게 모은 포군들이 봉급 체불로 흩어져 버리고 포군의 폐단을 호소하는 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옵니다.
대원군의 군사력 증강은 결국 백성들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돌아왔기에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방군의 강화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역시 재정문제로 일부 중요 지역만 보수되고 강화되었을뿐 제도 그 자체가 바뀌거나 전반적으로 달라질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의 재정이 궁핍한 것은 왕실과 일부 유력 가문들이 토지를 대량으로 소유하였고 이들이 아무런 조세 부담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들에게 한두번 돈을 뜯어낼 수는 있었지만 감히 세금을 물리는 것은 당시 사고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조금씩 활성화되던 상업을 새로운 재원으로서 적극 장려하는 발상 역시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대원군은 결코 혁명가가 아니라 철저한 기성세력의 대표자였습니다. 즉 어디까지나 국왕과 왕실을 중심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선에서의 개혁과 변화이지, 조선의 근간 자체를 밑바닥부터 흔들수는 없었죠.
1873년 11월 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쓰린 속을 안고 물러난후 그가 애써 이룩한 군사력은 금새 흐지부지 되는데, 고종은 아버지보다도 훨씬 원리원칙도 없고 즉흥적이었습니다.(한마디로 무능)
결코 "좋게" 권력을 이양받은 것이 아닌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의 재등극을 무척 경계할 수 밖에 없었는데 궁궐의 경비와 직속 친위대로서 "무위소"를 창설하게 됩니다. 무위소는 개항이후인 1880년대까지도 지속적으로 증강되는데(최대 4,399명) 이는 새로운 병력과 재원이 아니라 훈련도감을 비롯한 기존 군영에서 병력과 재원을 빼낸 것이었습니다. 대원군이 적극 육성한 진무영은 3천명에서 1천명 남짓으로 감축됩니다. 따라서 고종의 주변은 든든해졌지만 타 군영들이 부실해짐으로서 조선의 전반적인 군사력은 되려 약화되었죠. 봉급이 수개월이나 체불되고 극심한 차별대우가 나중에 "임오군란"으로 폭발하는 것입니다.(최초의 신식군이자 교련대인 별기군도 이 무위영 소속이었습니다.)
황현이 "대원군이 시행한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모조리 혁파하였다"라고 고종을 비판하였듯, 고종은 친정과 동시에 무신들의 지위를 격하하였고 군사 재정을 위한 각종 세금도 모조리 혁파합니다. 명분은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라고 했으나 세수 감소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기껏 한 말이 "금주령"과 "관원들이 봉급을 털어서라도 채우라") 이때문에 조정의 재정은 급격히 악화되어 바로 다음달부터 관원들의 녹봉조차 체불될 상태에 직면하죠.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이 군비였는데 무기와 장비의 보수는 완전히 중단되었고 군인들의 봉급도 대폭 축소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작 무위소에 대한 재정지원은 최우선이 되다보니 타 군영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더욱 악화됩니다.
나름대로 신식무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국의 위협에 대해서도 위기감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음에도 정작 행동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힘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혼자 앉아 고민만 할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군사력 증강이나 재정 안정을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한 친위대인 무위소 강화에만 집착할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전반적인 군사력 약화뿐 아니라 각 군영끼리의 파벌싸움과 알력다툼으로 이어졌죠.
고종은 신중한 고민이나 검토없이 어떤 정책을 매우 즉흥적으로 밀고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개항기 이후 신식군대를 만든다고 지방군제를 아무런 대책없이 해체하여 군사력과 치안 공백을 자초한 것이나, 20세기초 대한제국때까지도 이런 태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정책은 그 의도가 어떠하건 실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무능한 것이었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중대한 원인이 됩니다.
[출처] 개항기이전 대원군과 고종의 국방정책과 그 한계|작성자 욱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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