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5. 이율곡의 "십만양병설" 허구론에 대해

2022. 10. 15. 15:01Finance, 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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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곡의 "십만양병설" 허구론에 대해 

 기타전쟁 

2013. 11. 12. 9:47

 https://blog.naver.com/atena02/100199680287

우선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이 허구라고 주장한 사람은 이덕일씨입니다. 그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서인계열의 노론들이 동인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송시열의 스승이자 서인의 영수였던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에서 이율곡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동인의 영수였던 유성룡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송시열은 "율곡연보"에서 '선조16'년이라는 구체적인 연도까지 제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서적에서는 "십만양병설"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조작이다"라는 것입니다. 사실 김장생은 이율곡과 같은 시대사람이기는 한데 이율곡이 조정에서 실세로 활동하던 시기에 김장생은 한낱 지방관에 불과했기에 직접 자기 눈으로 보고 들었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귀동냥으로 들었던 얘기를 적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이율곡이 '10만명'이라는 숫자를 못 박았다거나 유성룡이 반대했다는 설은 이덕일씨 말대로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은, 이율곡을 비롯해 조정 관료들과 재야에서 군사력이 너무나 유명무실해졌다는 것, 국가 재정이 심각하게 피폐해졌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주장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당시 북방에서는 니탕개의 난, 남쪽에서는 삼포왜란, 각지에서 민란과 도적이 횡행함에도 국가에서는 이렇다할 방책이 없었으며 중앙의 군사력이 부재하다보니 니탕개의 난에서 1만명이 넘는 여진족들이 국경을 돌파하여 변경의 마을과 거점들을 일방적으로 유린하는데도 중앙에서는 고작해야 100명, 200명 정도의 병력을 증원하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함경도조차 조선군은 여기저기 설치된 진과 보를 거점으로 수십명에서 많아야 수백명이 분산배치되었고 세종시절 김종서처럼 대규모 병력을 집결하여 적극적으로 토벌에 나선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습니다. 한개 방어선이 무너지면 적이 내륙 깊숙히 침공해도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진관체제 대신 제승방략으로 전환되었으나 단지 제도만 바뀌었을뿐 군사력 자체가 재편된 것은 아닌데다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없어 실효성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대안을 내놓기는 커녕 기축 옥사 등 파벌들간의 권력의 주도권을 잡는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이율곡이 "군대의 정비"를 주장하였습니다.

 

 
선조 17권,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1월 22일(병자) 2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이가 군대를 정비할 것을 상소하다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병중에 출사(出仕)하여 숙배(肅拜)하고 이어 사면(辭免)하니, 답하였다.
“아조(我朝)의 병력(兵力)이 전조(前朝)에 못 미치고 있는데 오랫동안 승평(昇平)을 누린 나머지 병정(兵政) 또한 해이된 지 오래이다. 나는 가끔 그것을 생각하고 남몰래 걱정하였으며, 실로 적당한 인재를 얻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경(卿)은 경장(更張)과 개기(改紀)를 부단히 주장해 왔었으니 이것은 바로 경의 평소의 생각인 것이다. 지금 경이 참으로 기발한 계책을 세워 전래의 폐습을 모조리 혁파하고 이어 양병(養兵)의 계획을 세운다면 국가에 있어서 다행일 것이다. 《서경(書經)》에 ‘융병(戎兵)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고, 유자(劉子)도 ‘나라의 큰 일은 제사와 군대이다.’고 하였으며, 순자(筍子)도 ‘군대가 크게 정리되면 천하를 제어할 수 있고 작게 정리되면 가까운 적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다. 군대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니 경은 그 점에 대하여 노력하라. 또 병을 조리하면서 행공(行公)하더라도 일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니 사면하지 말라.”
 
조 17권,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2월 15일(무술) 2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이가 관리의 잦은 교체, 양병, 재용, 전마, 수세 등에 대해 상소하다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아뢰었다.
“우리 나라가 오래도록 승평(昇平)을 누려 태만함이 날로 더해 안팎이 텅 비고 군대와 식량이 모두 부족하여 하찮은 오랑캐가 변경만 침범하여도 온 나라가 이렇게 놀라 술렁이니, 혹시 큰 적이 침범해 오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어떻게 계책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먼저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대비한 다음에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 나라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어 적이 오면 반드시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한심하고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더구나 지금 경원(慶源)의 적으로 말하면 1∼2년만에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만약 병위(兵威)를 한번 떨쳐 그들의 소굴을 소탕해 버리지 않는다면 육진(六鎭)은 평온을 누릴 기회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서둘러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길러 후일의 대책을 세우지 아니하고, 그때그때 미봉책만 쓰려 든다면 어찌 한 모퉁이에 있는 적만이 걱정거리이겠습니까. 아마 뜻밖의 환란이 말할 수 없이 많게 될 것입니다.
 
신은 원래 부유(腐儒)로서 외람되이 병관(兵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애태우며 생각한 나머지 감히 한 가지 계책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대강만을 아뢰고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는 면대(面對)하여 자세히 아뢰겠습니다. 그 조목을 말씀드리면, 첫째 현능(賢能)을 임용할 것, 둘째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세째 재용(財用)을 풍족하게 만들 것, 네째 번병(藩屛)을 튼튼하게 할 것, 다섯째 전마(戰馬)를 갖출 것, 여섯째 교화(敎化)를 밝힐 것 등입니다.
 
현능을 임용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요체가 있는 것이니 임금이 위에서 조종하면서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현자(賢者)가 위(位)에 있고 능자(能者)가 직(職)에 있으면서 제각기 성의와 재주를 다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관직을 제수할 때면 의당 사람을 고르고는 있지만 아침에 임명하고 저녁에 딴 곳으로 옮겨버려 자리가 따스해질 겨를이 없으므로, 비록 그가 임무를 다하고 싶더라도 다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공(周公)·소공(召公)·이윤(伊尹)·부열(傅說)과 같은 어짐과 재주가 있을지라도 오늘 사도(司徒)를 맡겼다가 내일은 사구(司寇)를 맡긴다면 치적은 이루지 못하고 분주히 수고롭기만 할 뿐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만큼 어질지도, 재주가 있지도 않은 자이겠습니까.
 
지금 관리가 자주 바뀌는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정병(呈病)이고, 둘째는 피혐(避嫌)입니다. 정병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는 뭇 신하에게 하교하여 모든 일에 있어서 실(實)을 힘쓰고 형식적인 습속을 따르지 말 것이며, 실제로 병이 아니면 정사(呈辭)를 못하도록 하고, 간혹 병을 핑계대는 자가 있으면 드러나는 대로 규치(糾治)하며, 반드시 열흘 동안 병을 앓아야지만 비로소 정사를 허락하고, 첫 번째 정사를 한 후 열흘이 지난 후에야 재차 정사하게 하고, 두 번째 정사 후 또다시 열흘이 된 후라야지만 비로소 삼차 정사를 허락할 것이며, 만약 같은 관아에서 한 관원이 정사를 하였으면 다른 관원은 함께 정사를 할 수 없게 합니다. 만약 병이 있어 부득이 함께 정사를 해야 할 때는 반드시 그 관아 전체가 회의를 하여 입계(入啓)한 연후에 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병하는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피혐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는 무릇 대간(臺諫)에 있어 합당치 않은 인물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혐 때문에 체차(遞差)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대간이 비록 추고를 당하더라도 그 때문에 체차하지는 않았고 사헌부(司憲府)를 추고할 경우에는 사간원(司諫院)에다 내렸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요순(堯舜)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매사를 다 잘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보면 대관(大官)들은 추고를 당하고도 행공(行公)을 하는데 그들에 대하여는 별로 염치에 관계되지 않는 것처럼 넘기면서도 유독 대간에 있어서만은 반드시 성현(聖賢)이 되기를 요구하여 털끝만한 잘못이 있어도 반드시 체차를 하고야 맙니다. 임금의 이목이 되고 있는 그들이 자주 바뀌면 공론이 따라서 갈팡질팡하게 되니 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체통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여파가 자연 다른 관(官)에까지 파급되어 역시 자주 체차가 있게 되니, 모든 치적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고사(古事)를 상고하여 대간이 추고를 당하더라도 그 때문에 체차하지는 않는다는 규정을 부활하여야만 피혐의 폐단이 바로잡아지리라 여겨집니다. 다만 자주 바뀌어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나 적임자가 아닌 자에게 그 자리를 오래 맡겨놓는 것이나 치적을 이루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대소 관원에 있어 일반 규정에만 얽매이지 말고 널리 현재(賢才)를 찾아모아 적재 적소에 임명하도록 힘쓰고, 대관을 제수할 때는 반드시 대신들의 뜻을 물어서 가려 임명하실 것이며, 일단 인재를 얻어 믿고 맡겼으면 뜬 말로 인한 동요가 없어야만 현자에게 맡기고 능자를 부리는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군민(軍民)을 기른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양병(養兵)은 양민(養民)이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양민을 하지 않고서 양병을 하였다는 것은 옛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나라 부차(夫差)의 군대가 천하에 무적이었지만 결국 나라가 망한 것은 양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어 사방이 곤궁한데 당장 대적(大敵)이라도 나타난다면, 비록 제갈양(諸葛亮)이 앉아 계략을 짜고 한신(韓信)·백기(白起)가 군대를 통솔한다 하여도 어찌 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발하려 해도 조발할 군대가 없고 먹이려 해도 먹일 곡식이 없으니, 아무리 슬기로운 자라 할지라도 어찌 재료가 없음을 핑계삼지 않겠습니까. 이는 모든 색군사(色軍士)의 임무가 괴롭고 수월함이 고르지 않아 수월한 자는 그런대로 견디지만 괴로운 자는 도망갈 수밖에 없는데 일단 도망을 가면 그 일족(一族)이 책임을 지게 되어 연쇄적으로 화(禍)가 번져 가서 심한 경우엔 마을 전체가 몽땅 비는 사례까지 있게 되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현능(賢能)한 자를 각별히 선택하여 국(局)을 설치하여 군적(軍籍)을 관장하게 하고 괴롭고 수월한 자를 서로 교대시켜 그 역(役)을 균등하게 하며, 군사가 도망간 지 3년이 지나면 한정(閑丁)을 다시 모집하여 그 자리를 메우는 등, 반드시 모든 색군사가 다 지탱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일족이 책임을 지는 폐단을 없앤다면 군민(軍民)의 힘이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밖의 휴양(休養)·생식(生息) 등에 관한 규정은 국(局)을 설치한 뒤 그 일을 맡은 자가 강구하면 되는 것이며, 훈련 방법에 있어서는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
 
재용을 풍족하게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족병(足兵)은 족식(足食)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1백만 군대가 하루아침에 흩어지게 되는 것은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국가 저축은 1년도 지탱 못할 빈약한 것이니, 참으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이 경우입니다. 위아래가 이러한 걱정이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재정을 늘릴 방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어찌할 수 없다는 핑계만 대고 있으니, 큰 적이라도 나타나 남쪽이나 북쪽에서 돌진하여 온다면 무엇으로 군량(軍糧)을 할 것입니까. 국가의 저축이 날로 줄어드는 원인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수입은 적은데 지출이 많은 것이고, 둘째 수세(收稅)를 맥도(貉道)로 하는 것1015)이며, 세째 제사(祭祀)가 번독(煩黷)한 것입니다. 수입은 적고 지출이 많다고 한 것은 이렇습니다. 조종조에서는 세입(稅入)은 많았는데 씀씀이는 넓지 않았으므로 1년이면 반드시 남는 것이 있었으니 그렇게 해가 거듭된 끝에 홍부(紅腐)1016)현상까지 있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년 세입으로 그해 1년의 지출을 충당하지 못하는 데다 권설(權設)1017)은 날로 불어나고 용관(冗官)1018)은 너무도 많아서 해마다 숙저(宿儲)로 경비를 메워 왔으므로 2백 년이나 된 이 나라에 단 1년의 비축도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세입을 헤아려 세출을 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관(官)과 무익한 지출을 일체 혁파하며, 전수(典守)의 관 역시 규획을 엄하고 분명히 하여 도난을 당하지 않게 하여야만 비로소 바닥이 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 여깁니다.
 
수세를 맥도로 한다고 한 것은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10분의 1의 조세를 받았으나 공용(公用)이 모자라지 않았고 백성들도 원망이 없었습니다. 조종조에서 9등급으로 수세를 하였던 바 그 법이 세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시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관리는 게을러지고 백성들은 완악하여져서 번번이 급재(給災)1019)를 해주는 것으로써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아 왔기 때문에 지금은 하지하(下之下)를 상지상(上之上)으로 삼더라도 급재하지 않은 전답이 거의 없을 정도이니 국용(國用)이 어찌 바닥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형세가 이러한 데에 이르렀으니 비록 어진 수령(守令)이라도 감히 급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생(民生)은 날로 곤경에 빠지고 요역(徭役)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곤경에 처하게 된 원인은 해결해 주지 않고서 오직 급재를 하지 않는 것만이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길이라 한다면 적자(赤子)들이 더욱 지탱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인인(仁人)·군자(君子)로서 어찌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전역(田役)으로 하여금 10분의 7∼8 정도를 절감받게 한 후에 경우에 따라 가세(加稅)할 것은 가세하도록 하여 국용에 여유가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끝내 공사간에 풍족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제사가 번독하다고 한 것은 이렇습니다. 옛날의 성제(聖帝)·명왕(明王)이 누가 대효(大孝)가 아니었겠습니까마는 제사에 있어서는 번독하지 않은 것을 귀히 여겼으므로 종묘(宗廟)에는 월제(月祭)만을 지냈고 원묘(原廟)는 없었습니다. 한(漢)나라 이후로 원묘를 두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이 이미 고제(古制)가 아닌 데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점 잘못 전래되어 지금은 일제(日祭)를 지내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너무나 번독한 것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종묘와 각릉(各陵)에는 삭망제(朔望祭)를 행하고 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에는 삼시제(三時祭)를 행하고 있는데, 그것이 물론 조종(祖宗)을 추원(追遠)하는 성효(誠孝)에서 나온 것이지만 당우(唐虞)와 삼대(三代) 시절 성왕들의 제도에 비한다면 번란(煩亂)하다는 경계를 피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사는 정성과 정결함이 중요한 것인데, 문소·연은 두 전(殿)에는 하루 세 번 제사를 올리므로 주관하는 자가 권태를 느끼고 일상적인 습관에 젖어 음식도 정하게 잘 익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릇도 깨끗이 씻지 않아 정성도 없고 정결하지도 못하니 신(神)도 틀림없이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제왕(帝王)의 효도가 어디 거기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옛날에는 흉년이 들면 제사도 양감(量減)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나라 전체에 저장된 곡식이 없어 한 해 흉년든 정도가 아닌데 어찌 변통(變通)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종묘에만은 종전대로 삭망제를 올리고, 각능에는 네 명일(名日)에만 제를 올리고 문소전·연은전에는 하루 한 차례만 행하고 나머지 두 때는 폐지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음을 재계하고 찬수를 정결히 하여 정성을 다한다면 제왕의 효도에 있어 조금도 손색될 것이 없고 오히려 빛이 날 것이며, 제수(祭需) 비용도 3분의 1은 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종의 영령께서도 대업을 넓히고 기지를 개척하시는 성상의 성효에 감동하여 향기로운 제사에 더욱 흠향하실 것입니다.
 
번병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이 복심(腹心)이라면 사방은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울타리가 튼튼해야지만 복심이 믿는 데가 있어 안정을 누릴 것인데, 지금 사방의 여러 고을들이 모두 잔폐(殘弊)되어 있는 데다 감사(監司)까지 자주 바뀌어 백성들이 도주(道主)가 어느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가령 포악한 적이 불의에 나타나 사납게 쳐들어온다면 감사가 비록 창졸간에 절제(節制)를 하려고 해도 백성들이 서로 믿지를 않아 명령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니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폐잔한 작은 고을들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민력(民力)이 신장되도록 하고 감사를 골라 임명하되 오래 맡겨 은위(恩威)가 도 전체에 미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신복(信服)하도록 만든다면, 평상시에는 휴양(休養)이 될 것이고 유사시에는 적을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이니 울타리가 튼튼해지고 나면 국가는 반석같이 안정이 될 것입니다. 혹자는 감사의 권한이 너무 커질까 의심하지만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감사로 임명되면 모두가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데 오래 있는 자는 10여 년씩 있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권한이 커질 것을 우려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지금 양계(兩界)를 맡아 가면 그 재임 기간이 24개월에 불과하고 다른 도도 이와 비슷한데, 그 2년 동안에 어떻게 한 도(道)를 마음대로 하여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사람만 제대로 고른다면 권한이 커지는 것은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전마(戰馬)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나라 안에는 전마가 몹시 귀하여 혹시 군대(軍隊)를 조발(調發)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보졸(步卒) 밖에는 쓸 수 없으니, 말탄 저들과 보졸인 우리가 어떻게 상대가 되겠습니까. 지금 섬에 있는 말도 문서에만 있고 실지의 수는 적어 날이 갈수록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가령 고실(故失)1020)이 없다손 치더라도 섬에 흩어져 있어서 야수(野獸)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유사시에는 쓸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경외(京外)의 무사(武士)들 중 기사(騎射)에 능한 자들을 골라 재주를 시험하여 그중의 우등자를 뽑은 다음 그들을 목장(牧場)으로 보내 본도의 도사(都事) 또는 본읍의 감목관(監牧官)과 함께 감목(監牧)을 하게 하면서 그 무사들로 하여금 목장에서 전용(戰用)에 적합한 장마(壯馬)를 스스로 고르게 하되 입격(入格)한 성적 순위로 나누어 준 다음 말의 털빛과 크고 작음, 높고 낮음 등의 척촌수(尺寸數)를 기록한 적(籍)을 세 부 작성, 1부는 병조(兵曹)로 올리고, 1부는 사복시(司僕寺)로 보내고, 1부는 본관(本官)에다 비치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타는 말은 자신이 잘 먹이게 하여 매년 말(末)에 서울은 사복시에서, 외지는 본읍에서 각각 그 비척(肥瘠)을 살펴 상과 벌을 내리고, 만약 말이 죽었을 경우에는 관에 고하여 검시(檢屍)를 받고, 그것이 지급받은 후 5년 이내에 죽은 것이면 값을 따져 징수하고 만약 5년이 넘어서 죽었으면 값을 징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변(事變)이 닥쳤을 때는 적(籍)을 살펴 그것들을 전마(戰馬)로 수용하며 그 사람이 만약 종군(從軍)을 한다면 그 말은 자신이 타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섬의 말들이 쓸모없이 버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탈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마(唐馬)·호마(胡馬)도 널리 무역하여 역시 이러한 방법으로 무사들에게 나누어 주면 무업(武業)에 종사하는 자는 말이 없을까를 걱정하지 않게 되고 국가는 국가대로 유사시에 대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교화를 밝혀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전(傳)에도 있듯이 ‘옛부터 죽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다.’ 하였고, 맹자(孟子)도 이르기를 ‘어진 자로서 자기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으며, 의로운 자로서 자기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는 자는 없다.’ 하였습니다. 설사 식량이 충분하고 군대가 족하더라도 인의(仁義)가 없다면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풍속이 박악(薄惡)하고 의리(義理)가 모두 없어진 것은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염치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지만, 역시 교화(敎化)가 제대로 안 되어 강유(綱維)를 진작시킬 수 없는 데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오기(吳起)는 일개 웅걸한 장군에 불과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말에도 ‘도(道)로 편안하게 하여 주고, 의(義)로 다스리며, 예(禮)로 움직이고, 인(仁)으로 어루만져 주는 것이니, 이상의 네 덕[四德]을 잘 닦으면 흥하고 폐하면 쇠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군대를 통솔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禮)로 가르치고 의(義)로 격려하여 부끄러워할 줄 알게 해야 한다. 사람이 부끄러워할 줄을 알면 크게는 전쟁을 치를 수 있고 작게는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오기도 오히려 이러한 말을 남겼는데, 하물며 지금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어찌 교화(敎化)가 급선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다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니 우선 주자(胄子)부터 가르치기 시작해야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태학(太學)과 사학(四學)의 관(官)부터 적임자를 골라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고, 외방 군읍(郡邑)의 교관(敎官)들도 비록 다 적임자를 골라 둘 수는 없을지라도 역시 별도의 계책을 세워 유풍(儒風)을 일으킴으로써 점점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이 스며들게 해야 할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포기해 버릴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조선실록에서도 병조판서였던 이율곡은 위기 의식을 강조하면서 군사력의 정비를 주장했다는 것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다만 "10만명"이라고 구체적으로 못 박지는 않았을 뿐이죠.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율곡의 의도는 단순히 병사 몇 명을 더 뽑고 안 뽑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국가 시스템 자체에 대한 개혁입니다. 애초에 왜 군사력이 유명무실화되었는가, 이는 조선이 하도 평화로운 지상낙원이라서 군대가 필요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군대의 유지에 필요한 재정이 바닥났기 때문이고 재정이 바닥난 이유는 토지의 태반과 광산, 삼림, 염전 등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요 이권이 세금을 내지 않는 왕실과 권력층에게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이율곡의 결론은 기득권 계층더러 밥그릇을 내놓으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권력층 입장에서는 군사력의 정비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자기 밥그릇을 내놓는건 당연히 싫고 따라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쉽과 의지가 있었다면 몰라도 선조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결국 갑론을박만 벌어졌을뿐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참고로, 이이는 평소에도 정적들이 많았지만(이는 그의 성격탓도 있지만 어차피 권력이란 오르면 오를수록 적이 많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권력은 낭떠러지라고 하는 것이죠.) 그가 양병과 개혁을 주장한 후 양사(사간원, 사헌부)를 중심으로 절차상의 문제와 그가 사사로이 권력을 전횡하니 파직시켜야 한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더욱 강하게 나왔고 결국 스스로 사직합니다. 당시 조정은 여러개의 파벌이 형성되어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서로 상대방이 私黨을 만들고 있다고 격렬히 비난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더욱 국정의 리더쉽은 표류할 수 밖에 없었죠. 그렇다고 해서 오해해서 안되는 것은, 이이만 좋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간신배라는 식의 이분법적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정치란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기에 이상대로 되는 법이 아닙니다.

 

지금도 개혁이라고 정책이 나오면 국회를 거치면서 누더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국회의원들이 기득권 계층이기에 자기 밥그릇을 보호하는게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나름 민주주의랍시고 언론과 여론의 어느정도의 견제라도 받는 지금도 그러한데 하물며 그 시절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국익보다 내 밥그릇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세상 모든 이들의 본능이죠. 아니면 해탈한 사람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