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17권,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1월 22일(병자) 2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이가 군대를 정비할 것을 상소하다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병중에 출사(出仕)하여 숙배(肅拜)하고 이어 사면(辭免)하니, 답하였다.
“아조(我朝)의 병력(兵力)이 전조(前朝)에 못 미치고 있는데 오랫동안 승평(昇平)을 누린 나머지 병정(兵政) 또한 해이된 지 오래이다. 나는 가끔 그것을 생각하고 남몰래 걱정하였으며, 실로 적당한 인재를 얻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경(卿)은 경장(更張)과 개기(改紀)를 부단히 주장해 왔었으니 이것은 바로 경의 평소의 생각인 것이다. 지금 경이 참으로 기발한 계책을 세워 전래의 폐습을 모조리 혁파하고 이어 양병(養兵)의 계획을 세운다면 국가에 있어서 다행일 것이다. 《서경(書經)》에 ‘융병(戎兵)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고, 유자(劉子)도 ‘나라의 큰 일은 제사와 군대이다.’고 하였으며, 순자(筍子)도 ‘군대가 크게 정리되면 천하를 제어할 수 있고 작게 정리되면 가까운 적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다. 군대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니 경은 그 점에 대하여 노력하라. 또 병을 조리하면서 행공(行公)하더라도 일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니 사면하지 말라.”
선조 17권, 16년(1583 계미 / 명 만력(萬曆) 11년) 2월 15일(무술) 2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이가 관리의 잦은 교체, 양병, 재용, 전마, 수세 등에 대해 상소하다
“우리 나라가 오래도록 승평(昇平)을 누려 태만함이 날로 더해 안팎이 텅 비고 군대와 식량이 모두 부족하여 하찮은 오랑캐가 변경만 침범하여도 온 나라가 이렇게 놀라 술렁이니, 혹시 큰 적이 침범해 오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어떻게 계책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옛말에, 먼저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대비한 다음에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 나라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어 적이 오면 반드시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한심하고 간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더구나 지금 경원(慶源)의 적으로 말하면 1∼2년만에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만약 병위(兵威)를 한번 떨쳐 그들의 소굴을 소탕해 버리지 않는다면 육진(六鎭)은 평온을 누릴 기회가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지금 서둘러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길러 후일의 대책을 세우지 아니하고, 그때그때 미봉책만 쓰려 든다면 어찌 한 모퉁이에 있는 적만이 걱정거리이겠습니까. 아마 뜻밖의 환란이 말할 수 없이 많게 될 것입니다.
신은 원래 부유(腐儒)로서 외람되이 병관(兵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애태우며 생각한 나머지 감히 한 가지 계책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대강만을 아뢰고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는 면대(面對)하여 자세히 아뢰겠습니다. 그 조목을 말씀드리면, 첫째 현능(賢能)을 임용할 것, 둘째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 세째 재용(財用)을 풍족하게 만들 것, 네째 번병(藩屛)을 튼튼하게 할 것, 다섯째 전마(戰馬)를 갖출 것, 여섯째 교화(敎化)를 밝힐 것 등입니다.
현능을 임용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요체가 있는 것이니 임금이 위에서 조종하면서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현자(賢者)가 위(位)에 있고 능자(能者)가 직(職)에 있으면서 제각기 성의와 재주를 다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관직을 제수할 때면 의당 사람을 고르고는 있지만 아침에 임명하고 저녁에 딴 곳으로 옮겨버려 자리가 따스해질 겨를이 없으므로, 비록 그가 임무를 다하고 싶더라도 다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공(周公)·소공(召公)·이윤(伊尹)·부열(傅說)과 같은 어짐과 재주가 있을지라도 오늘 사도(司徒)를 맡겼다가 내일은 사구(司寇)를 맡긴다면 치적은 이루지 못하고 분주히 수고롭기만 할 뿐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만큼 어질지도, 재주가 있지도 않은 자이겠습니까.
지금 관리가 자주 바뀌는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첫째는 정병(呈病)이고, 둘째는 피혐(避嫌)입니다. 정병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는 뭇 신하에게 하교하여 모든 일에 있어서 실(實)을 힘쓰고 형식적인 습속을 따르지 말 것이며, 실제로 병이 아니면 정사(呈辭)를 못하도록 하고, 간혹 병을 핑계대는 자가 있으면 드러나는 대로 규치(糾治)하며, 반드시 열흘 동안 병을 앓아야지만 비로소 정사를 허락하고, 첫 번째 정사를 한 후 열흘이 지난 후에야 재차 정사하게 하고, 두 번째 정사 후 또다시 열흘이 된 후라야지만 비로소 삼차 정사를 허락할 것이며, 만약 같은 관아에서 한 관원이 정사를 하였으면 다른 관원은 함께 정사를 할 수 없게 합니다. 만약 병이 있어 부득이 함께 정사를 해야 할 때는 반드시 그 관아 전체가 회의를 하여 입계(入啓)한 연후에 하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정병하는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피혐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는 무릇 대간(臺諫)에 있어 합당치 않은 인물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혐 때문에 체차(遞差)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대간이 비록 추고를 당하더라도 그 때문에 체차하지는 않았고 사헌부(司憲府)를 추고할 경우에는 사간원(司諫院)에다 내렸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요순(堯舜)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매사를 다 잘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보면 대관(大官)들은 추고를 당하고도 행공(行公)을 하는데 그들에 대하여는 별로 염치에 관계되지 않는 것처럼 넘기면서도 유독 대간에 있어서만은 반드시 성현(聖賢)이 되기를 요구하여 털끝만한 잘못이 있어도 반드시 체차를 하고야 맙니다. 임금의 이목이 되고 있는 그들이 자주 바뀌면 공론이 따라서 갈팡질팡하게 되니 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체통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여파가 자연 다른 관(官)에까지 파급되어 역시 자주 체차가 있게 되니, 모든 치적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고사(古事)를 상고하여 대간이 추고를 당하더라도 그 때문에 체차하지는 않는다는 규정을 부활하여야만 피혐의 폐단이 바로잡아지리라 여겨집니다. 다만 자주 바뀌어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나 적임자가 아닌 자에게 그 자리를 오래 맡겨놓는 것이나 치적을 이루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대소 관원에 있어 일반 규정에만 얽매이지 말고 널리 현재(賢才)를 찾아모아 적재 적소에 임명하도록 힘쓰고, 대관을 제수할 때는 반드시 대신들의 뜻을 물어서 가려 임명하실 것이며, 일단 인재를 얻어 믿고 맡겼으면 뜬 말로 인한 동요가 없어야만 현자에게 맡기고 능자를 부리는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군민(軍民)을 기른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양병(養兵)은 양민(養民)이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양민을 하지 않고서 양병을 하였다는 것은 옛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나라 부차(夫差)의 군대가 천하에 무적이었지만 결국 나라가 망한 것은 양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민력(民力)이 이미 고갈되어 사방이 곤궁한데 당장 대적(大敵)이라도 나타난다면, 비록 제갈양(諸葛亮)이 앉아 계략을 짜고 한신(韓信)·백기(白起)가 군대를 통솔한다 하여도 어찌 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발하려 해도 조발할 군대가 없고 먹이려 해도 먹일 곡식이 없으니, 아무리 슬기로운 자라 할지라도 어찌 재료가 없음을 핑계삼지 않겠습니까. 이는 모든 색군사(色軍士)의 임무가 괴롭고 수월함이 고르지 않아 수월한 자는 그런대로 견디지만 괴로운 자는 도망갈 수밖에 없는데 일단 도망을 가면 그 일족(一族)이 책임을 지게 되어 연쇄적으로 화(禍)가 번져 가서 심한 경우엔 마을 전체가 몽땅 비는 사례까지 있게 되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현능(賢能)한 자를 각별히 선택하여 국(局)을 설치하여 군적(軍籍)을 관장하게 하고 괴롭고 수월한 자를 서로 교대시켜 그 역(役)을 균등하게 하며, 군사가 도망간 지 3년이 지나면 한정(閑丁)을 다시 모집하여 그 자리를 메우는 등, 반드시 모든 색군사가 다 지탱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일족이 책임을 지는 폐단을 없앤다면 군민(軍民)의 힘이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밖의 휴양(休養)·생식(生息) 등에 관한 규정은 국(局)을 설치한 뒤 그 일을 맡은 자가 강구하면 되는 것이며, 훈련 방법에 있어서는 우선 양민부터 하고 나서 논의할 일입니다.
재용을 풍족하게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족병(足兵)은 족식(足食)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1백만 군대가 하루아침에 흩어지게 되는 것은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국가 저축은 1년도 지탱 못할 빈약한 것이니, 참으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이 경우입니다. 위아래가 이러한 걱정이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재정을 늘릴 방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어찌할 수 없다는 핑계만 대고 있으니, 큰 적이라도 나타나 남쪽이나 북쪽에서 돌진하여 온다면 무엇으로 군량(軍糧)을 할 것입니까. 국가의 저축이 날로 줄어드는 원인은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수입은 적은데 지출이 많은 것이고, 둘째 수세(收稅)를 맥도(貉道)로 하는 것1015)이며, 세째 제사(祭祀)가 번독(煩黷)한 것입니다. 수입은 적고 지출이 많다고 한 것은 이렇습니다. 조종조에서는 세입(稅入)은 많았는데 씀씀이는 넓지 않았으므로 1년이면 반드시 남는 것이 있었으니 그렇게 해가 거듭된 끝에 홍부(紅腐)1016)현상까지 있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년 세입으로 그해 1년의 지출을 충당하지 못하는 데다 권설(權設)1017)은 날로 불어나고 용관(冗官)1018)은 너무도 많아서 해마다 숙저(宿儲)로 경비를 메워 왔으므로 2백 년이나 된 이 나라에 단 1년의 비축도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세입을 헤아려 세출을 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관(官)과 무익한 지출을 일체 혁파하며, 전수(典守)의 관 역시 규획을 엄하고 분명히 하여 도난을 당하지 않게 하여야만 비로소 바닥이 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 여깁니다.
수세를 맥도로 한다고 한 것은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10분의 1의 조세를 받았으나 공용(公用)이 모자라지 않았고 백성들도 원망이 없었습니다. 조종조에서 9등급으로 수세를 하였던 바 그 법이 세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시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관리는 게을러지고 백성들은 완악하여져서 번번이 급재(給災)1019)를 해주는 것으로써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아 왔기 때문에 지금은 하지하(下之下)를 상지상(上之上)으로 삼더라도 급재하지 않은 전답이 거의 없을 정도이니 국용(國用)이 어찌 바닥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형세가 이러한 데에 이르렀으니 비록 어진 수령(守令)이라도 감히 급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생(民生)은 날로 곤경에 빠지고 요역(徭役)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곤경에 처하게 된 원인은 해결해 주지 않고서 오직 급재를 하지 않는 것만이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길이라 한다면 적자(赤子)들이 더욱 지탱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인인(仁人)·군자(君子)로서 어찌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전역(田役)으로 하여금 10분의 7∼8 정도를 절감받게 한 후에 경우에 따라 가세(加稅)할 것은 가세하도록 하여 국용에 여유가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끝내 공사간에 풍족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제사가 번독하다고 한 것은 이렇습니다. 옛날의 성제(聖帝)·명왕(明王)이 누가 대효(大孝)가 아니었겠습니까마는 제사에 있어서는 번독하지 않은 것을 귀히 여겼으므로 종묘(宗廟)에는 월제(月祭)만을 지냈고 원묘(原廟)는 없었습니다. 한(漢)나라 이후로 원묘를 두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이 이미 고제(古制)가 아닌 데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점 잘못 전래되어 지금은 일제(日祭)를 지내기에까지 이르렀으니 너무나 번독한 것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종묘와 각릉(各陵)에는 삭망제(朔望祭)를 행하고 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에는 삼시제(三時祭)를 행하고 있는데, 그것이 물론 조종(祖宗)을 추원(追遠)하는 성효(誠孝)에서 나온 것이지만 당우(唐虞)와 삼대(三代) 시절 성왕들의 제도에 비한다면 번란(煩亂)하다는 경계를 피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사는 정성과 정결함이 중요한 것인데, 문소·연은 두 전(殿)에는 하루 세 번 제사를 올리므로 주관하는 자가 권태를 느끼고 일상적인 습관에 젖어 음식도 정하게 잘 익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릇도 깨끗이 씻지 않아 정성도 없고 정결하지도 못하니 신(神)도 틀림없이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제왕(帝王)의 효도가 어디 거기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옛날에는 흉년이 들면 제사도 양감(量減)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나라 전체에 저장된 곡식이 없어 한 해 흉년든 정도가 아닌데 어찌 변통(變通)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종묘에만은 종전대로 삭망제를 올리고, 각능에는 네 명일(名日)에만 제를 올리고 문소전·연은전에는 하루 한 차례만 행하고 나머지 두 때는 폐지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음을 재계하고 찬수를 정결히 하여 정성을 다한다면 제왕의 효도에 있어 조금도 손색될 것이 없고 오히려 빛이 날 것이며, 제수(祭需) 비용도 3분의 1은 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종의 영령께서도 대업을 넓히고 기지를 개척하시는 성상의 성효에 감동하여 향기로운 제사에 더욱 흠향하실 것입니다.
번병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이 복심(腹心)이라면 사방은 울타리가 되는 것입니다. 울타리가 튼튼해야지만 복심이 믿는 데가 있어 안정을 누릴 것인데, 지금 사방의 여러 고을들이 모두 잔폐(殘弊)되어 있는 데다 감사(監司)까지 자주 바뀌어 백성들이 도주(道主)가 어느 사람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니, 가령 포악한 적이 불의에 나타나 사납게 쳐들어온다면 감사가 비록 창졸간에 절제(節制)를 하려고 해도 백성들이 서로 믿지를 않아 명령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니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패할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폐잔한 작은 고을들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어서 민력(民力)이 신장되도록 하고 감사를 골라 임명하되 오래 맡겨 은위(恩威)가 도 전체에 미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신복(信服)하도록 만든다면, 평상시에는 휴양(休養)이 될 것이고 유사시에는 적을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이니 울타리가 튼튼해지고 나면 국가는 반석같이 안정이 될 것입니다. 혹자는 감사의 권한이 너무 커질까 의심하지만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감사로 임명되면 모두가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데 오래 있는 자는 10여 년씩 있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권한이 커질 것을 우려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지금 양계(兩界)를 맡아 가면 그 재임 기간이 24개월에 불과하고 다른 도도 이와 비슷한데, 그 2년 동안에 어떻게 한 도(道)를 마음대로 하여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사람만 제대로 고른다면 권한이 커지는 것은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전마(戰馬)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나라 안에는 전마가 몹시 귀하여 혹시 군대(軍隊)를 조발(調發)할 일이 있을 경우에는 보졸(步卒) 밖에는 쓸 수 없으니, 말탄 저들과 보졸인 우리가 어떻게 상대가 되겠습니까. 지금 섬에 있는 말도 문서에만 있고 실지의 수는 적어 날이 갈수록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가령 고실(故失)1020)이 없다손 치더라도 섬에 흩어져 있어서 야수(野獸)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유사시에는 쓸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경외(京外)의 무사(武士)들 중 기사(騎射)에 능한 자들을 골라 재주를 시험하여 그중의 우등자를 뽑은 다음 그들을 목장(牧場)으로 보내 본도의 도사(都事) 또는 본읍의 감목관(監牧官)과 함께 감목(監牧)을 하게 하면서 그 무사들로 하여금 목장에서 전용(戰用)에 적합한 장마(壯馬)를 스스로 고르게 하되 입격(入格)한 성적 순위로 나누어 준 다음 말의 털빛과 크고 작음, 높고 낮음 등의 척촌수(尺寸數)를 기록한 적(籍)을 세 부 작성, 1부는 병조(兵曹)로 올리고, 1부는 사복시(司僕寺)로 보내고, 1부는 본관(本官)에다 비치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타는 말은 자신이 잘 먹이게 하여 매년 말(末)에 서울은 사복시에서, 외지는 본읍에서 각각 그 비척(肥瘠)을 살펴 상과 벌을 내리고, 만약 말이 죽었을 경우에는 관에 고하여 검시(檢屍)를 받고, 그것이 지급받은 후 5년 이내에 죽은 것이면 값을 따져 징수하고 만약 5년이 넘어서 죽었으면 값을 징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변(事變)이 닥쳤을 때는 적(籍)을 살펴 그것들을 전마(戰馬)로 수용하며 그 사람이 만약 종군(從軍)을 한다면 그 말은 자신이 타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섬의 말들이 쓸모없이 버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는 탈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마(唐馬)·호마(胡馬)도 널리 무역하여 역시 이러한 방법으로 무사들에게 나누어 주면 무업(武業)에 종사하는 자는 말이 없을까를 걱정하지 않게 되고 국가는 국가대로 유사시에 대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교화를 밝혀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전(傳)에도 있듯이 ‘옛부터 죽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다.’ 하였고, 맹자(孟子)도 이르기를 ‘어진 자로서 자기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으며, 의로운 자로서 자기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는 자는 없다.’ 하였습니다. 설사 식량이 충분하고 군대가 족하더라도 인의(仁義)가 없다면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풍속이 박악(薄惡)하고 의리(義理)가 모두 없어진 것은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염치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지만, 역시 교화(敎化)가 제대로 안 되어 강유(綱維)를 진작시킬 수 없는 데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오기(吳起)는 일개 웅걸한 장군에 불과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말에도 ‘도(道)로 편안하게 하여 주고, 의(義)로 다스리며, 예(禮)로 움직이고, 인(仁)으로 어루만져 주는 것이니, 이상의 네 덕[四德]을 잘 닦으면 흥하고 폐하면 쇠한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군대를 통솔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禮)로 가르치고 의(義)로 격려하여 부끄러워할 줄 알게 해야 한다. 사람이 부끄러워할 줄을 알면 크게는 전쟁을 치를 수 있고 작게는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오기도 오히려 이러한 말을 남겼는데, 하물며 지금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어찌 교화(敎化)가 급선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다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니 우선 주자(胄子)부터 가르치기 시작해야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태학(太學)과 사학(四學)의 관(官)부터 적임자를 골라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고, 외방 군읍(郡邑)의 교관(敎官)들도 비록 다 적임자를 골라 둘 수는 없을지라도 역시 별도의 계책을 세워 유풍(儒風)을 일으킴으로써 점점 백성들에게까지 영향이 스며들게 해야 할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포기해 버릴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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