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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1 16:57:46
초강대국을 잇달아 물리친 베트남의 영웅, 그는 왜 문화재 발굴에 매달렸을까│인터비즈
2018. 9. 14. 13:54
[DBR/동아비즈니스리뷰] 1953년 프랑스는 나바르(Henri Navarre) 장군을 인도차이나 지역 주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임무는 베트남 북쪽 국경 근처에서 점점 세력을 넓혀오고 있는 베트민(Viet Minh·베트남독립동맹·越盟) 군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나바르 장군은 베트남 북부지역을 치밀하게 조사한 후 북서부에 위치한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를 점거했다. 그곳에 있던 베트민 군대를 몰아낸 뒤 3개 사단 병력 1만 5000명을 주둔시켰다. 디엔비엔푸는 북부 산간지역에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곳을 점령하면 보급로가 끊어진 베트민이 반드시 반격할 거라고 판단했다.
나바르 장군은 베트민 군대가 디엔비엔푸를 공격해 와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첫째, 프랑스 정보 부대는 베트민의 병력이 5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다고 봤다. 둘째, 재래식 무기에 의존하고 있는 베트민군의 화력은 프랑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약하다고 판단했다. 셋째, 베트민군은 험준한 산악에서 전투를 오래 이어갈 수 있는 충분한 보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서방 언론 역시 ‘인도차이나에서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며 프랑스의 승리를 낙관했다.
강대국을 차례로 격파한 위대한 전략가, 보응우옌잡 장군
1954년 3월 13일 드디어 베트민 군대가 디엔비엔푸 공격을 개시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전쟁 양상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베트민군은 놀라운 화력으로 북동쪽에 위치한 포병기지를 집중 공격했다. 대포는 보이지도 않는데 수백 발의 포탄이 여기저기에서 날아왔다. 당황한 프랑스군은 어디에다 반격을 해야 할지 몰랐다. 포격이 시작된 지 한 시간 만에 5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베트민 보병들이 쳐들어왔다. 새까맣게 밀려드는 베트민군의 규모에 압도된 프랑스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포병기지는 7시간 만에 프랑스 병사들의 무덤으로 변했다.
베트민은 디엔비엔푸 전투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를 점거하자마자 그곳으로 무기와 식량을 수송해 몇 달을 버틸 수 있는 자원을 확보했고, 프랑스 정찰기의 눈을 피해 밤에 땅굴을 파서 움직였다. 실제로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가한 병사도 6만 명이 훨씬 넘었다. 1만 5000병력의 프랑스군이 4배나 많은 베트민군에 당황해 우왕좌왕한 것이 초반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또 베트민은 중국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아 최신식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대부분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갈 때 미군과 연합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수거해 베트민 군대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베트민군은 부상자들을 실어가기 위해 착륙한 프랑스군의 수송기를 폭격해 격파했다. 이후 프랑스 공군은 디엔비엔푸에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프랑스군에게 불리해졌고, 결국 탄알이 다 떨어진 프랑스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55일 만에 이뤄낸 베트민의 완벽한 승리였다.
우리는 승리를 위해 공격한다는 걸 명심해주시오.
성공이 확실한 경우에만 공격할 것이오.
디엔비엔푸 전투는 단일 전투로 프랑스가 경험한 최대 규모의 패배였다. 이 전투로 잡 장군은 프랑스 식민 지배의 사슬을 끊었고, 그의 이름을 세계사에 등장시켰다.
디엔비엔푸 전투로 프랑스가 물러난 후 제네바 협상이 열렸다.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공산당이 주도하는 북베트남과 미국의 동맹인 남베트남으로 나뉘게 됐다. 이후 잡 장군은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한 미군과 오랜 기간 전쟁을 치렀다. 어떤 장수도 상상하지 못할 독창적인 전략을 펼쳐 1973년 미군을 베트남에서 내쫓았다. 1979년에는 캄보디아 침공을 빌미로 중국이 베트남을 침략했지만 잡은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중국에 승리했다. 잡 장군은 20세기 최고 열강인 프랑스, 미국, 중국을 차례로 격파했다. 베트남은 20세기 내내 전 세계에서 가장 못살고 발전이 덜된 약소국이었다. 부족한 물자와 취약한 군사력으로 미국 같은 초강대국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군과 싸우며 우리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세 가지를 피했어요. 우선 적들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았고, 그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았으며,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싸웠습니다.
미국을 이긴 비결
1968년 1월31일 자정, 잡 장군은 베트남의 최대 명절인 구정에 맞춰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게릴라인 베트콩이 연합해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 관공서, 국가 시설에 대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8만 명이 넘는 병사가 동원된 대규모 공세였다.그때까지 잡 장군은 전면전을 피하는 전략을 써왔기 때문에 기습 초반에 미군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병력은 수적으로 우세했다. 85만의 남베트남 정규군과 54만 미군을 포함해 183만 명의 병사를 기습으로 모두 무찌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일주일 이내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제압됐다. 3만2000명이 전사했고 58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미군 총사령관인 웨스트멀랜드(William Westmoreland) 장군은 구정 공세의 승리로 북베트남에 치명타를 입혔다고 보고했다. 그는 구정 공세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기습했으나 연합군의 반격으로 퇴각해 독일을 패배로 이끈 벌지 대전투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이번 기회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워싱턴에 수십만 명의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미군 사령부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이 전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돼 갔다. 사이공(現 호찌민 시)에 있는 미 대사관 역시 구정 공세 목표였다. 1월 31일 새벽 수류탄으로 담벼락에 커다란 구멍을 뚫고 19명의 자살특공대가 침입해 대사관 경비병들과 총격전을 벌였다. 해병대에서 대규모 병력이 출동해 불과 6시간 만에 게릴라들을 모두 제압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시작됐다. 6시간 동안 공격을 받는 사이 대사관에 있던 취재기자들이 이 짧은 전투를 목격하고 기사를 써댄 것이다. 특종을 노렸던 기자들은 전투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첫 뉴스를 본국으로 타전했다. 그중에는 미 대사관이 점령당했다는 자극적인 오보도 있었다.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이전까지 베트남 전쟁은 커다란 전투 없이 진행되는 지루한 전쟁이라 미국인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구정 공세를 계기로 베트남이 텔레비전과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기자들이 베트남을 취재하면서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TV 뉴스의 간판 앵커가 베트남에 다녀와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결국 미국 내 여론이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구정 공세가 끝난 지 두 달 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미국 국민의 60%가 미군의 패배를 인정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전국적으로 학생운동과 반전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더해 전장에 투입된 미군 대부분이 흑인이나 가난한 백인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새로운 사회갈등이 생겨났다. 결국 존슨 행정부는 국민들의 압력에 전쟁 규모를 줄이기로 했다. 전쟁을 확장하려는 웨스트멀랜드 장군을 해임했다. 지지도가 떨어진 존슨 대통령은 차기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정권은 공화당으로 넘어갔다.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점차 미군을 철수하기 시작했고 1973년에는 베트남에서 발을 뺐다. 미군이 물러나자 전쟁은 손쉽게 끝났다. 1975년 4월30일 남베트남 정부의 항복으로 잡 장군은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이겼다.
구정 공세는 주요 도시와 관공서에 대한 타격이 목표가 아니었다. 잡 장군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적을 섬멸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적의 싸울 의지를 없애면 된다고 생각했다. 미군 병사들의 싸울 의지를 없애기 위해 게릴라전을 고안했다. 게릴라전은 심리전으로 공격 대상과 장소가 불분명해 미군 병사들을 공포스럽게 만들어 전투 의지를 꺾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장군들의 의지를 꺾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잡 장군은 미국 내 정치 상황에 영향을 줘 반전 분위기를 조성하기로 했다. 저널리스트 출신인 그는 구정 공세가 미디어의 관심을 이끌어내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방위가 철통같은 대사관이나 미군 기지를 골라서 공격한 것이다. 미국의 뉴스에 나오는 게 목표였다. 미군은 전투에서 이김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했지만 잡 장군은 전쟁을 더 크게 바라봤다.
승리에 대한 믿음이 승리에 대한 원동력
잡 장군의 독창적인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1967년 여름 북베트남 정부는 대대적인 유물 발굴 작업에 나섰다. 우연히 하노이 근처 홍하 델타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이 시기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 고조돼 이틀이 멀다 하고 북베트남에 폭격이 가해지던 때였다. 그래서 주로 밤중에 조심스레 작업을 수행했다. 결론적으로 이 유물은 기원전 2000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 청동기시대의 유적이었다. 이 유적 발굴로 베트남이 청동기 문화 이래 4000년 동안 독립적인 역사를 발전시켜온 유구한 민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4000년을 이어온 민족이 고작 몇 십 년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단 말인가. 지금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물리칠 수 있을 거란 사실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었다.
잡 장군은 보잘 것 없는 군사력으로 세계 최강대국을 잇달아 물리쳤다. 달리 보면, 그는 군사력에서 열세였으므로 창의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창의적인 전략은 머릿속에서 한두 시간 고민해 바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은 더 힘들고, 더 불확실하다. 믿음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어렵고 힘든 길을 의심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 성공에 대한 믿음은 기업에도 필수적이다. 기업은 직원들에게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심어준 후, 본업에 충실해 한 분야에서 최고라는 자신감을 싹 틔우고, 작은 성공 체험으로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현하게 해야 한다. 이런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성공에 대한 믿음'이 생겨난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49호
필자 이병주
인터비즈 임유진, 강병기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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